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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성의 우물(천池)
 곽병조
 2011-04-19 17:22:08  |   조회: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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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폐왕성의 우물과 기타
폐왕성 유래는 우리시민 누구나 다 아는 역사이다, 폐왕성을 비롯해서 의종의 대비장이 있는 안치봉. 그 뒤에 있는 여관이(여갱이, 농막주민들이 부르는 호칭), 고려무덤 (고름등), 거림부락옆 기성관 유적지등은 이미 조사와 발굴을 하여 일부사람들이 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고 알려지지 않고 조사를 하지 않은곳들이 있다, 제석당과. 토성, 공주샘, 폐왕성 의 우물(天池)의 전설등은 향토사에도 없다, 제석당은 농막부락끝 마하터 마을앞에 기성관 유적 발굴지 근처을 가리켜 옛날이나 지금이나 년세 많은분들이 제석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석당은 사당을 지어놓고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소원을 빌던 곳이다, 오랜 세월에 기성관도 제석당도 모두가 없어지고 오직 그 이름들 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제석당 성황당 산신당 칠성당 이 모두가 우리 조상들이 신을 묘셔놓고 신들에게 소원을 빌던 곳이다, [三神堂 (帝釋堂=桓因天帝 모시는곳, 城隍堂=桓雄天皇 모시는곳, 山神閣(堂)=檀君王儉 모시는곳), 七星堂=土俗神堂? 筆者, 註], 토성(土城)은 폐왕성의 성벽바깥 서남쪽 7 ~ 80M지역에 소나무숲속을 거닐다 보면 허물어진 토성이 수십미터 둘러있고 그 안에 오륙십년 전에는 논이 두어마지기 있어서 논농사를 지었다 지금도 소나무속을 찾아보면 그 토성과 논(沓)의 흔적을 볼수 있을 것이다, 토성도 함께 개발해야 될줄 믿는다, 공주(公主)샘은 지금 방하부락 공지거리에 있는 우물인데 부락사람들이 (공지샘)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예날부터 있었던 샘(泉)이다 언제 생겼는지 그역사를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공주(公主?)샘이란 전설이 전해 올 뿐이다, 폐왕성우물은 전해오는 전설에는 그우물에다 명주실 꾸리를 던져 넣으면 실꾸리가 갱이바다에서 뜬다는 전설이 지금도 내려오고있다 그만큼 샘이 깊었다는 것이다, 수년전에 어느대학 사학자들이 와서 보고 그곳을 집수하는 웅덩이로 보고 비가오면 빗물을 모아서 용수로 사용하는 집수지 공사를 하면서 바닥에 물이 새지않게 집수정을 새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곳에 태어나서 70년 넘게 살아오면서 그것이 우물과 샘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집수를 하는 웅덩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그것이 빗물을 저장하는 집수지(集水池)라면 당시 성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식수는 성(城)근쳐 어느곳에라도 우물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 바깥 어디에도 우물이나 샘이 있었던 곳은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된성 아래부락 태생의 반00이란 분이 어디서 어떻게 그런말을 들었는지 폐왕성보다 높은 우두봉에서 나는 물을 이샘에 끄러다가 넣어 식수로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다는 말을했다는데 과연 그말대로라면 물을 끄러오는 도수로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세월이 오래되었다 해도 약간이라도 흔적은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다, 또 성터가 산등성이를 타고와서는 산등성이보다 수십m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다 성벽을 축성을 하였음으로 우두봉에서 물을 끄러오드라도 중간에서 물을받아서 공중으로 통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도수로공사를 수백m나 되게 공중시설을 해야만 성안의샘(웅덩이?)에다 집수를 시킬수가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흔적도 없고 어디서나 발견했다는 말도 없다, 폐왕성 탐사 사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물을 가두는 집수지(集水池)라고는 결코 이해(理解)가 되지 않는다, 강화도 마리산정상의 참성단에 올라가면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물이 없는 샘터만 남았는데 4~50년전에는 등산객들이 정상의 참성단에 올라가면 그곳의 우물에서 물을떠서 마셨다고한다, 첨성단 산 정상(頂上)은 산전체가 바위산으로 되어 있는데도 그 산정(山頂)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마리산 정상뿐 아니고 전국의 산 꼭대기 마다 우물이 나지 않는곳이 별로 없다싶이 한반도는 백두산 천지의 물이 마치 사람 몸속에 혈맥처럼 산맥을 타고 전국의 산하(山河)에 그물같이 통하고 있음으로 이곳 폐왕성에도 우물이 그당시에는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며 지금은 다만 우물의 수맥이 막혀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바다가운데 있는 외딴 작은 바위섬 꼭대기에도 물이 솟아오르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것인가, 통영시 욕지면 노대리의 아래노대 작은섬에 가 보면 높이30m가량되는 바위섬 등성이 바위틈에서 밤낮으로 솟아나오는 물로 샘을 만들고 간이상수도를 설치하여 주민 10여가구가 식수와 모든생활용수로 사용하는 것을 30여년전에 10여일 동안 머물면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샘물 주위의 지형이 온통바위로 되어 있어서 비가 아무리 와도 단 10분도 못되어서 빗물이 바다로 내려가고 땅속으로 스며들어갈 여지가 없는 곳이였다, 그샘물은 그 섬에서 빗물을 받아 생산되는 물이 아니고 저 깊은 바다속에 있는 땅속의 수맥을 타고 올라 오지 않으면 그런 물이 주야로 나올수 없다고 생각 되었다, 어째거나 폐왕성의 우물은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때도 샘은 막혀서 얕은 웅덩이로 되어 있었지만 물은 항상 고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제시 문화공보과에 지금 새로 만들어 놓은 집수정을 관계 전문학자들이 면밀히 조사를 다시해서 본래의 수맥을 찾아서 원래의 샘을 개발하고 원상복구가 될수있기를 권의 드립니다
고려(高麗)무덤에 대하여서는 2-3년전에 별도로 거제시 홈폐이지의 인터넷에 민원으로 건의를 드린바가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기타 마을 명칭에 대하여는 언제부터인가는 모르겠지만 농막(農幕)마을은 8,15해방 전후의 그시절에 살아계시던 노인네들이 농막마을을 용막(龍幕)이라고 불렀다 일제시대의 면사무소에서나 군행정에서는 농막(農幕)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8,15해방전후 내가 어렷을때만해도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만 년세가 일백사오십세가 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 께서는 모두가 용막(龍幕)이라고 불렀지 농막이라고는 부르지는 않았다 여기서 장목면 농소(農所)부락 이름도 용소(龍所)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지나친 생각일까?..... 일제가 조선을 점령한 뒤에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별난짓을 다 동원하는 가운데 용(龍)자 붙은 지명(地名)까지도 모조리 농(農)자로 고쳣다는 어느 수필가의 글을 내가 읽은 적이 있어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산방(山芳)마을을 대몰(大村)이라 불렀고 방하(芳下)부락을 아랫몰(下村)이라 햇고 절골(寺谷)은 지금과 같이 절골로 불렀다 어구(於九)동네는 외인금이고 옥동과 유지사이을 함덕이라 했다, 상하죽전(上下竹田)을 웃 대밭골, 아랫 대밭골로 그시절의 사람들은 불렀다
20011년 4월 일
2011-04-19 17: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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