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이야기’ 제1회의 글에서 나는 국학을 ‘우리가 누구인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했다. 너라는 타자(他者)와 너의 대상인 내가 만나 어떻게, 그리고 무엇이 우리라고 부르게 하는지, 우리의 정신적 DNA를 찾아 우리가 누구인지, 너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찾는 신원조회 작업이 국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원조회에서 우리가 되게 하는 인자(因子)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이다. 우리의 피에, 뇌 속에 ‘한’이 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타자로 돌아서야 한다. 우리 생래 이전의 자리가 ‘한’이다. 그 한이 담긴 경전이 81자로 된 ‘천부경’이다. 천부경은 ‘얼’을 숫자로 설명한 인류 최고(最古)의 경전이다.
“우주 만물은 하나에서 시작했지만 그 하나는 시작도 끝남도 없는 하나다. 그 하나는 셋으로 갈라졌지만 그 본성의 자리 하나는 다함이 없다. 사람의 몸 안에는 하늘과 땅이 다 들어와 있다”고 천부경은 시작한다.
이 하나가 바로 한얼이다.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너희 머리 속에는 한얼이 내려와 있고 너희 팔과 다리에는 천지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 …너희는 한얼 속에 한울 안에 한알이니라”라고 했다. 이 말씀으로 이 민족과 인류를 구원할 수가 있다.
이런 믿음을 가르치고 일러주는 것이 단학(丹學)이다. 때문에 국학의 핵심에 단학이 있고 단학의 중심에는 한얼이 담긴 뇌호흡이 있다. 이것은 신앙도 종교도 아니다. 깨닫고 나면 자명한 사실일 따름이다. 견성(見性)이니 성통(性通)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이 한얼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그의 깨달음을 자기만 지니려 않는다.
깨닫고 나면 자명한 사실
깨우쳐 준다는 것은 바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자기가 한알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한알은 한울 안에 있고 한얼 속에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누굴 믿고 안 믿고의 종교적 신앙은 필요없다.
그냥 알고 깨닫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 때, 나아가 세계가 이것을 알 때, 역사와 사상의 뿌리를 알 때, 결국 모든 종교와 사상은 인간을 포함해 우주의 만물이 큰 나무에 열린 하나의 열매임을 알게 된다. 서로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는 싸우지만 한 가지에 열린 형제임을 알 때, 이산가족의 재회 같은 환희를 느낀다.
싸우는 세상이다. 갖가지 이기심으로 연일 싸우며 지새는 요즘이다. 하지만 신원조회를 통해 서로가 헤어졌던 형제자매임을 알게 될 때 싸움은 멎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
스스로 병이 낫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다. 이 신원조회 구실을 하는 것이 국학이고 단학이다.
‘한’의 의미에는 20여 가지가 있다. ‘하나’의 준말로서 하나라는 개체이기도 하면서 한덩어리 한울 속에 있는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다(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이 창조다. 그 여럿이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과정이 생성진화의 원리다. 한사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천부경은 5대 원리를 담고 있다. 그 첫째가 진화, 창조의 원리이다.
천부경에는 천당, 지옥, 죄와 벌의 이야기가 없다. 속죄와 구원의 교리는 없다. 하나(一)에서 시작해 하나(一)로 끝난다. 하나라는 개념은 동일한 존재에 대한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명제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
한마디로 단군시대 한민족의 우주관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천부경의 ‘一始無始, 一終無終一’이다. 구체성과 추상성, 절대성과 상대성, 특수성과 보편성의 관계의 표현이다. 바로 이 대칭적 성격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사물과 사물 사이의 상대적 관계를 끌어안으면서 부정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원리는 현상에 대한 부분적 부정과 부분적 긍정의 융합을 의미한다.
‘하나’는 근본인 만물의 ‘얼’
‘주역(周易)’에서 ‘역이불이(易而不而,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다)’ ‘불역이대역(不易而大易, 바뀌어도 바뀌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도 크게 보면 바뀐다)’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천부경의 ‘하나(一)’는 가변성과 불가변성의 융합체다. 이것은 단군시대 지성인들의 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런 견해나 사고는 생성과 소멸이 단절의 연속이 아니라 소멸되고 생성되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그래서 천부경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원리와 사상을 담고 있다.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이다. 쓰임은 바뀌어도 그 밑동인 하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는 근본인 만물의 ‘얼’을 의미한다. 얼은 우리의 뿌리다. ‘얼’이란 알맹이의 옛말이다. 천부경은 사람과 사물을 얼이라는 알맹이와 생성 소멸하는 현상이 융합된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역’(易-바뀜)과 ‘불역’(不易-바뀌지 않음)의 결합이 아닌 융합체가 존재라고 표현한 천부경이다.
때문에 천부경이 말하는 ‘하나(一)’는 생(生)도 사(死)도 아니다. 우리가 모태에서 태어나기 전에는 아마 현상적으로는 無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날 내가 김씨인지, 박씨인지, 한국사람인지 미국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상태에서 우선 우리는 ‘사람’이란 하나(一)로서 공통적이 된다. 그런 다음 성도 이름도 국적도 생긴다. 수없는 변화를 겪고 생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소멸(죽음)로써 하나(一)로 돌아간다.
‘한’의 자리는 인격적 신의 자리도 아니다. 천부경은 ‘한’으로 창조를 말하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단계의 정점에 앉아 창조와 파괴를 마음대로 하는 신은 없다. 처음도 마지막도 없는 비시원적(非始原的) 입장인 천부경은 절대자의 자리매김을 하지 않는다.
‘한’이 처음과 마지막의 융합이라면, 그것은 창조성이 없는 ‘한’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처음에서 마지막을 향해 가는 과정이 창조가 아닌가. 마지막이 있다지만 그것이 ‘하나’라는 처음이기에 처음과 마지막의 순환운동이 창조라는 생성이다.
천부경은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라는 천지인(天地人) 합일을 말하고 있다. 우주에 가득 찬 얼(한)이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사람 속에 하늘 땅이 하나(人中天地一)라는 사상은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으로 나타났다. 단군의 탄생신화에서도 하늘도 땅도 사람을 지향했다. ‘하나 속에 셋이, 셋 속에 하나가 있다’는 이 천지인 사상이야말로 우리 민족정신의 원형이라 하겠다. 이 민족정신이 신원조회의 기준이다. 이것을 되찾자는 운동이 국학이며 단학이고 뇌호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