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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규 기자님께(’태극기 휘날리며’ 안타까운 참전 형제)
 김현우
 2007-07-11 21:40:57  |   조회: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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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사회]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31일 유석오(당시 26세)·석환(18세) 형제는 국군 8사단에 함께 입대했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돌보는 집안의 기둥이었던 석오씨는 세살배기 아들과 딸을 임신한 아내를 뒤로한 채 였다.

동생은 징집되는 순간부터 큰 형의 뒤를 꼭 붙어다녔고 형제는 각각 ‘0181005’, ‘0181014’ 군번을 받고 같은 부대에 배속돼 강원도로 향했다.

겨울 눈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강원도 전쟁터에서 형제는 서로를 의지했다. 형제는 51년 2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때 강원도 횡성지구 전투에 참전했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해 4월 형제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하고자 전남 화순의 화학산으로 이동했다. 형제는 8사단 3대대 10중대에 배속돼 4월5일 화순읍 이십곡리에 도착했다. 이튿날 새벽 빨치산의 기습공격에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부대원 26명이 전사했다. 형제도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형제의 유해는 반세기 뒤인 2001년 5월21일 유해발굴작업을 통해 유가족에게 돌아왔고, 형제의 안타까운 사연은 최근에야 알려졌다. 형의 유해에서는 비옷 1점과 M1 소총 실탄 7발, 군복단추 22개가 나왔고, 동생은 전투화 1족, 숟가락 1개, 단추 6개, 비옷 1점을 남겼다. 형제는 일병으로 한 계급씩 특진해 현재 대전 국립현충원에 나란히 안장돼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실제 주인공 같은 느낌이들 정도다.

석오씨의 어린 아들은 피난길에 병을 얻어 숨졌고, 석환씨는 결혼을 하지 않아 후손이 없다.

당시 16세였던 막내 여동생 유석연(73·경기도 이천시)씨는 24일 “3남1녀 가운데 아들을 둘 씩이나 전쟁터에서 잃은 뒤 어머니는 눈물로 한 세월을 살다가 1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며 “아버지도 마음의 병이 크셨는지 전쟁이 끝나고 얼마안돼 돌아가셨다”고 한많은 가족사를 털어놨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엄기영 기자 eo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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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규기자님,이는 내 집 안의 자랑이 결코 아닙니다. 여지 것, 살아오면서 혹시나 싶어 6.25사변(전쟁)때에 살신성인으로 26살 나이에 인생을 그렇게 전사하신 분이자, 내 조부에 대해서 혹시나 언론에 실리까. 싶었는데요. 그런 것은 전혀 없데요.

※저의 큰 조부께서는 6.25사변 터지전에 육군 정식 위생 중사였습니다.
저의 조부께서는 6.25사변 터지기전에 단란한 한 가정을 꾸며든 가장이었습니다.
6.25사변이 터지자 저의 큰 조부는 육군 위생 정식 중사로 활약 했답니다. 그런데 세월 흘러 저의 큰 조부께서는 병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3년 동안 치열한 전란(戰亂)터에서 온 몸을 불태우면서 일선에서 싸웠다고 하데요. 6.25사변이 마치고도 조금 더 군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 가셨습니다.
저의 큰 조부를 국립현충원에 안장시키기 위해서 제가 여러모로 알아 보았습니다. 국방부이고, 육군본부이고,병무청이고 알만한 곳을 다 알아 보았습니다. 모두가 모른다고 딱 잘라 말을 하데요.
친 조부는 6.25사변이 터지고 2차로 출병을 하였습니다. 1950년 9월에 전사를 하였습니다. 저희 조부께서 사는 곳은 전란(戰亂)과 거리가 먼 아늑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참전 하였습니다. 당시 경북 낙동강까지 밀렸지요.경남 거제는 전란(戰亂)인 싸움과 거리가 멀어도 출병을 하였습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저희 조부께서 전사를 하시고 부산 제 5 육군 야전 병원으로 찾아가니까요. 주변에 함께 입원 해 있든 부상자들이 입을 모아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고 하데요.

왜, 이제 찾아 왔냐고 하시면서 살다가 살다가 그런 사람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전란(戰亂) 싸움터에서 그렇게 지독하게 싸우는 사람 처음 보았고, 북진하다가 한 쪽 다리 허벅지 관통 총상을 입고, 부산 제 5 야전 병원까지 후송되어 내려 와서는 병원에서 나오는 구호제와 음식물들을 주변에 더 아픈 부상자들을 돌보시다가 전사를 하셨다고 하데요.
할머니는 당시 남편(조모) 시신라도 보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군의관들한테 말을 했다고 하데요. 그런 싸움 전란에서도 군고위 수뇌부는 다 괜찮아져서 또 싸우로 갔다느니 말도 않되는 뻥만 늘어 놓았다고 하데요.
부산 제5 육군 야전 병원에서 전사를 했다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조부의 묘가 있어야 되는데요. 수 년 전에 알아 보니까요. 황당하데요. 마산지방보훈처도 그렇고 육군본부도 그렇고 면사무소도 그렇고 이렇게 기록이 되었데요. 강원도 오대산 지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다가 전사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데요.
분명한 것은 할머니께서 주변 부상자들한테서 듣고 온 말로는 한 쪽 다리 허벅지 관통 총상이라면 조부의 개인 욕심을 내어 야전병원에서 나오는 구호물자와 음식물을 악착 같이 챙겨 드셔드라면 살 수가 있었다고 하데요. 싸움터에서 싸우는 것보다 더 값진 희생인 살신성인의 삶을 살다가 26살 나이에 전사를 전사를 하셨어도 명예 훼손까지 되어 있습니다.
2003년6월24일 저의 조부는 형식적인 대전현충원에 싸웠다라는 명예만 찾는 초라한 위패식만 가졌습니다. 30만원 짜리 생애를 물려 주고 가셨습니다.

그래도 저희 집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마산보훈지청과 거제 일운면 김진수 예비군중대장한테 이런 사연들을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순전히 뻥 치더군요.


이런 내용들은 거제 일운면 김진수 예비군중대장과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알렸습니다.



아래 내용 주소(D)로 퍼서 읽어 보세요. 전 결코 거짓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많이도 바로 잡아야 됩니다. 내가 그 동안 어렵게 알아 낸 내용입니다.【제목;▒여기에 들어오는 블로그 친구분들께 전하는 진짜 이 나라의 안보와 역사입니다.▒ 】 http://kr.blog.yahoo.com/kappa042/5378.html 【여러 분들 족보라고 생각 마시고 역사라고 생각 하시고 보세요.】 http://kr.blog.yahoo.com/kappa042/1857.html 이 주소(D)대로 퍼서 읽어 보세요. 저희 집에 자랑이 아니고, 곧, 이 나라 이 땅에 역사가 저희 집과 크게 연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글을 올립니다. 진실의 역사를 이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전 한때 가까운 일본에서 이 한반도 넘어서는 중원대륙 적화통일 꿈을 키워 보았습니다. 내가 쌓이고 쌓인 한과 내 조부의 명예탈환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켜 보고 싶습니다. 만약, 일본의 현재 병력 24만명으로 한반도 한국을 침략하라고 하면, 2~3일 이내에 정복하면서 항복 서명을 받아 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도 24살 나이에 한국 해군에서 처녀 출동이자 6개월 된 당시에 최신형 PKM(참수리)-352호정과 함께 했든, 전우 31명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땐 기적이라고 했습니다.제가 군에서 큰 일을 해 내고도 그 당시에 언론에 밝켜지지 않은, 이유는 당시에 해군에 보안이 워낙 강해서 일반 사회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대중공업에서 당한 치욕적인 수모를 씻을 수 있도록 여러 언론을 통해서 좀 밝켜 주세요.
진정한 이 나라의 애국자 집에 후예 자손이 억울하게 당한 수모를 밝켜 내고 일어날 수 있게 끔 도와 주세요.
2007-07-11 21: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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