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의 유월
상념의 유월
  • 거제신문
  • 승인 20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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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주/거제수필문학회원

1950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한국전쟁은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피난민은 거제도로 몰려왔다. 그 당시 나는 천진난만한 초등학생이었다. 베잠방이에 삼베 등지게를 입고, 소 먹이고, 냇가에서 목욕을 하면서 여름방학을 즐겁게 보낼 때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폭격기의 기관총 소리에 질겁하여 냇가 바위틈에 숨었다, 천지가 진동하는 총소리와 포탄 터지는 소리에 귀를 막고 머리를 처박고 떨고 있었다.

폭격기 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비름네 쪽 오망천 나무 밑에는 피난민이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 현장을 처음 봤다.

북한군 폭격기에서 난사한 기관총과 폭탄에 피해를 입은 진동 피난민들이었다. 신음 소리와 구조하는 사람들의 다급한 소리가 귀곡성같이 들려왔다.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서는 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들이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애절한 절규가 보는 이의 가슴을 도려낸다. 시체 가운데 우리 또래의 여자아이가 총탄에 맞아 발 뒤가 날아간채 피를 흘리면서 정신을 잃고 있다가, 살겠다는 안간힘으로 겨우 눈을 떴다.

“엄마 나 좀 살려 줘!”

하며 몸부림쳐 운다. 그 광경을 구경거리처럼 바라보고 있다가 집에 와서 어머니께 방금 전에 본 광경을 말씀 드렸더니 ‘애처롭다’ 하시며 불쌍한 그 아이에게 보리밥과 무잎 김치를 갔다 주라고 했다.

잦은 흉년에 죽도 먹기 어려울 때다. 냄비 그릇에 담은 밥과 김치를 들고 달려갔다. 상처 난 소녀는 보이지 않고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다친 여자 학생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같이 온 듯한 그 또래의 소녀에게 물었다. 그 소녀도 겁에 질린 얼굴로 날 쳐다보면서 누가 와서 업고 갔는데 잘 모르겠다고 한다.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에 조금 전 피를 흘리며 아파하던 그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소녀에게 줄 밥을 대신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주었다.

육십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유월이 오면 문득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흥남에서 LST를 타고 온 피난민들은 우리보다 더 건강하고 옷도 잘 입고 있었다.

그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는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임시 시장이 생기고 이북 돈이 통용되었다. 그해 겨울방학 때부터 우리 학교 교실은 피난민 수용소가 되었다.

그래서 방학이 끝나고부터는 양지바른 뒷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공부를 했다. 비가 오면 휴학을 했다. 전쟁 중이라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아서인지 공부하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 기다려졌다. 공부보다 연 날리고, 제기차기 하면서 노는 게 훨씬 좋았다. 쪼들리게 못살던 농촌이지만 이웃사촌처럼 정을 나누며 살았다. 인정 많던 고향이 이제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폭격으로 얼룩진 상처는 치유가 되었건만 아직도 남북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분단 조국의 강산에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다.

상처 입었던 그 소녀가 살아 있다면, 아마 칠순이 다 되어갈 것이다. 상처 치료는 잘 되었을까? 이때가 되면 생각나는 그 소녀의 모습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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