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룡 기자의 봉하마을 조문 記
변광룡 기자의 봉하마을 조문 記
  • 변광용 기자
  • 승인 2009.0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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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새벽 1시30분께 조문객들이 타고 와 주차한 차량들이  김해시 공설 운동장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직접 조문하고 명복을 빌고 빈소 한 귀퉁이를 지켜야겠다는 무거움과 책임감 비슷한게 23일부터 죽 스스로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지인들이 상황을 전하고 함께 방문의 약속을 다지는 전화도 받았다. 그러나 사소한  몇 가지 일 때문에 늦어졌다.

진정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끝이 없이 조문객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27일 봉하 마을은 밤을 잊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유모차에 잠든 애를 태우고 걷고, 기다리고를 마다하지 않는 부모들, 교복을 입은채 촛불을 든 학생들도 고인을 보내는 안타까움을 함께하고 있었다. 경건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질서있게 기다리고 조문이 이어졌다.

27일 자정 무렵 김해공설운동장 주변 너른 주차장이 가득차고 있었다. 공설운동장에서 봉하마을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기위해 조문객들이 타고 와 주차한 차들이다. 고인의 떠나는 길에 국화 한송이로 애도의 묵념을 드리기 위한 긴 기다림의 시간이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사람들은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피곤해 함도 보이지 않았다. 길게 늘어 선 조문객들은 조금씩 조금씩 버스에 올랐다. 주간에는 8대, 야간에는 4대의 관광버스가 공설운동장과 봉하 마을을 10분 간격으로 계속 왕복한단다.

27일 새벽 1시 30분께 주차장 옆으로 봉화행 버스를 타기위해 조문객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전국 각지에서 밤을 달려 온 조문객들은 1시간을 넘게 기다려서야 봉하마을로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조문행렬은 시간에 비례해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버스에 올랐다. YTN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벽 2시 10분경 전국적으로 조문객이 60만을 넘었다는 보도였다.

뭐라 꼭 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갖은 상념들이 스쳐갔다. 그의 마지막을 안타까워 하고 죄스러워 하고 그래서 꼭 그분을 만나 마지막 가는 길 함께하고 싶다며 봉하 마을로, 각 지역 분향소로 달려온 사람들이다. 무엇을 의미할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애도의 슬픔과 고인에 대한 회상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로 버스 안 역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버스는 봉하마을 입구에 섰다. 고인의 빈소 까지는 1km 정도다. 이제 걸어서 가야한다. 조문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조문을 위해 빈소로 향하는 사람들로 입구부터가 북새통이다. 두 번째 기다림의 시간이다.

봉하마을 빈소로 가는 2차선 도로 오른쪽은 논으로 이어졌고 반대편은 나지막한 산으로 이어졌다. 드문 드문 집들이 보였다. 산 쪽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현수막이 이어졌고 도로 양 쪽 벽으로는 촛불이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신은 갔지만 우리는 보내지 않았습니다”는 노사모의 현수막도 보였다.

27일 새벽 2시 10분 께 봉화마을 입구에서 내린 조문객들이 1km 정도 떨어진 빈소

조문행렬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사람들은 별 말이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떡과 빵과 음료수를 권하고 있었다. 생전 고인이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위해 긴 시간 뚜벅뚜벅 걸어 온 것 같이 그분의 조문 행렬 역시 뚜벅뚜벅 흔들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피곤과 졸음으로 땅바닥에 주저 앉은 아이들도 있었다. 이 아이들, 촛불을 들고 조문을 기다리는 학생들, 이들에게 고인은 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빈소가 가까워질수록 분위기는 더욱 숙연해졌다. 긴 기다림도 마다 않고 조문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을 다 끝낸 사람들의 뿌듯함, 후련함’ 같은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조문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고인의 생전 육성과 영상물이 조문행렬을 먼저 맞이하고 있었다. ‘작은 연인들’, ‘타는 목마름으로’를 고인이 직접 부르고 있었다. 힘이 있었다. 소탈했다. 가식이 없었다.

빈소를 향하는 길 양쪽으로 조문객들이  켜 놓은 촛불들이 조문객들을 맞고 있다.(좌)

대학시절 선술집에서 시대를 고민하며 어깨 동무하고 거침없이 노래 불렀던 필자의 추억과 묘하게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감은채 조용히 함께 따라 불렀다. 혹은 눈을 감았다. 눈물을 애써 감추려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조금씩 나아가며 기다리기를 4시간여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빈소에 다다르기까지는 30분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다. 미어 터지는 조문행렬 때문이다. 더욱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빈소에 도착하자 진행자측의 안내가 있었다.

“조문객들이 너무 많아 50-60명씩 집단 분향을 하게 된다. 시간관계상 분향이나 절을 할 수가 없다. 헌화 후 묵념으로 한다” 등이었다. 진행자가 행렬을 끊었고 이에따라 조문이 이루어졌다. 사람들 손에는 국화꽃이 한송이씩 들려져 있었다.

분향소에 도착한 조문객들이 5-60 명 단위로 헌화 후 묵념을 올리고 있다.

긴 기다림이 이제 끝날 시간이다. 고인의 영정 앞에 국화꽃 한송이를 바쳤다. 그리고 “정말 편히 가십시오”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순간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단지 ‘이건 아닌데’라는 울부짖음만 속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

행정관을 지낸 지인이 상주노릇을 하고 있었다. 긴 말을 할 수 없었다. 악수하며 서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수고하십시오”라는 말을 끝으로 빈소를 빠져나왔다.

조문을 마치고 온 길을 터벅터벅 되돌아 나올때 쯤 봉하 마을은 날이 밝고 있었다. ‘내일은 해가 뜬다’는 말이 맞았다. 차오르는 햇살에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봉하 마을의 윤곽이 하나둘씩 선명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날은 밝아오고 있지만 떠나간 고인은 영영 다시 일어날 수 없다. 빈소를 한번 더 뒤돌아 보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조문객들을 맞는 상주들. 명계남, 권해효 등 평소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이날 새벽 조문객들을 맞았다. 참여정부시절 행정관 출신인 한 지인과 필자가 분양후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필자와의 추억

1988년쯤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김봉조 전국회의원의 보좌역으로 일할 때다. 마포 통일민주당사에서의 일이다. 의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고 필자는 밖 보좌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회의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중진 의원들이 당시 초선의원이었던 고인을 향해 “노의원, 노의원”하며 뒤따라 나왔다. “이런 회의 저는 못합니다”며 고인은 종진들의 부름을 뒤로하고 횡하니 나가버렸다.

“초선 주제에‘라는 비아냥거림을 필자는 들었다.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그 때 했다. 그 이유를 물어 볼 수도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필자의 짐작컨대 3당 합당 관련 내용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 이후 통일민주당은 3당 합당의 한 주체가 됐고 고인은 소위 ‘꼬마 민주당’으로 남았다. 고인의 소신과 원칙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국회의원 회관에서의 일이다. 고인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보좌진들간 친목모임 결성 관련이었다. 사무실을 들어선 순간 너무나 놀라왔다. 여는 의원실과 완전히 달랐다.

‘대학 총학생회 사무실 같았다’는게 필자의 당시 인상이었다. 대자보에서나 나올법한 문구, 구호가 의원실 벽에 걸려 있었고 노동자, 서민들의 절규하는 사진과 글귀들이 도배돼 있었다. 보좌진들의 업무 스타일, 좌석배치 등도 너무나 자유분방해 보였다.

그때만 해도 의원들의 권위주의는 지금과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그러나 고인의 사무실은 권위의식, 권의주의 냄새는 적어도 전혀 없었다. 5공 청문회때의 원칙과 소신 등이 따로 나온 것이 아니었고 그의 생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고인은 이때부터 이미 흔들림 없는 지향과 실천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고인은 젊은 시절 필자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을 강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고인과는 2007년 마산 사보이 호텔에서 또 한번 자리를 함께 했다. 고인은 그 때 지역균형개발을 강조했다. 필자는 국가균형발전위원의 자격으로 자리를 함께 했었다. 지역이 살아야 국가가 발전한다는 신념하에 분권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호소하던 고인의 육성이 새삼 살아 오르고 있다.

고인에 대한 평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정치적 색깔로 덧칠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역주의 타파, 정치개혁, 돈 안드는 정치, 권력기관 개혁, 국가균형발전, 서민적 리더십… 고인의 땀과 노력이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자기 것 버릴 각오하애 그렇게 사심 없이 임하신 지도자가 있었을까?

“짐 다 내려 놓으시고 편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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