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아침 7시 서둘러 길을 떠나야 했다.
노전대통령 국민장이 국민들의 슬픔속에서 끝났지만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유족측은 봉하마을 분향소를 49재까지 유지하기로 했고 당연히 이를 운영 관리할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했다.
필자는 10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봉사의 부름을 받았다. 이어지는 조문객들을 맞고 때로는 상주역할을, 때로는 안내 역할을, 때로는 분향소 관리 역할도 해야 했다.
척박한 지역에서 고인의 가치를 함께 외쳤던 필자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조그만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고 두 번째 봉하행 발길을 내 디뎠다. 이번에는 분향소 봉사 역할이었다.
분향소로 향하는 봉하마을 주변은 지난번 방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주변 들에는 모내기가 끝나 온통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차분하고 평화로와 보였다. 장례기간 당시 온 마을을 휘감아 돌던 슬프고 내려앉은 듯한 분위기는 조용한 평화로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산 쪽으로 빽빽이 이어진 애도 현수막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 숙연한 분위기를 여전히 뿜어내고 있었다.
규모가 다소 축소됐지만 분향소는 장례기간 조문객들을 맞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설치돼 있었다.
고인이 즐겨 불렀다는 ‘상록수’와 ‘마른 잎 다시 살아나’등의 노래가 조용히 분향소를 울리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로 부름을 받은 몇 몇 사람들이 자기의 역할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필자는 먼저 안내를 맡았다.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행렬을 이었다. 방명록 주소란에 미국 LA로 기록하는 조문객도 있었고 서툰 한글로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일본 사람도 분향소를 찾았다. 서울에서 아이와 함께 직접 꽃을 준비해 헌화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한 아주머니도 있었다. 서울, 인천, 성남, 광주, 전북, 천안, 창원, 제주 ...
관광버스가 연이어 섰고 관광객들의 집단 조문도 이어졌다. 꽃이 모자라 사용한 꽃을 손질해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도 해야 했다.
봉하마을 만큼은 아직도 상 중인 것 같았다.
서울서 왔다는 한 여대생은 “지지하지도 않았고 지지자도 아니지만 너무나 슬펐다. 꼭 조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이렇게 왔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불쌍해서 어쩌나”는 할머니 조문객들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명록에 가장 많이 적혀진 문구는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편히 쉬세요” 등 이었다
이들은 노사모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다. 가정의 행복과 건강을 바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야말로 나라의 주인인 서민들이다.
이들이 왜 미안해하고 죄송해 하는지.....그리고 이제서야 ‘사랑합니다’ 고백하는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분노인가? 연민인가?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가?
평일 1만에 가까운 조문객, 주말 10만이 넘는 조문객이 여전히 찾고 있다는 봉하마을 분향소, 국민들은 분향소 방문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한 지인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나”고 말을 던졌고 지인은 나름의 분석을 냈다. “민주주의, 지역균형발전, 한반도 평화, 소외계층 껴안기 등 소위 노무현 가치가 그의 극단적 죽음을 계기로 재발견되고 있는 것”이라며 “조문객들은 이같은 가치의 몰락을 안타까워 하고 있는 것이다”고 했다.
고인의 서거, 고인이 생전 추구해 왔고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가치를 보는 시각과 방향은 다를 수 있다. 슬퍼하고 분노하는 국민들에 못마땅해 하는 시각도 있고 이를 꾸짖는 목소리도 분명 있다. 그러나 장례가 끝난지 1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 봉하마을을 찾으며 그를 기억하려 하고 마지막 인사를 기필코 해야겠다는 경향각지 조문객들의 발걸음들이 진하게 색칠되고 폄훼되서는 결코 안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꽃을 나르고 향로를 갈고 열을 끊어 조문객들에게 분향케 하고 안내 인사를 하는 등 하루 내내 정신이 없었다. 그날따라 태양도 뜨거웠다. 허리가 아프고 당장이라도 주저 앉고 싶을정도로 다리도 아파다. 그러나 분향소 주변을 휘감는 숙연한 분위기와 다소 완화됐지만 여전한 무거운 분위기가 ‘의연하라’고 자신을 더욱 강제하고 있었다.
교대를 위해 함안 합천 등 지역에서 봉사자 2명이 왔다. 악수를 나누며 역할을 교대한 후 필자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민주주의, 지역균형발전, 한반도 평화, 소외계층 껴안기, 서민적 리더십’ 이란 말들이 내려오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2009년 6월 대한민국, 한 사람의 죽음이 잊혀져 가던 소중한 가치를, 결코 훼손되서는 아니될 우리 대한민국의 가치를 뜨거운 정서로 되새기게 하고 있다.
분향소를 지키며 몇 번이나 곱씹었던 공지영 소설가가 바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
대통령이면서 시민이자 했고 정치인이면서 정의롭고자 했으며
권력을 잡고도 힘없는 자 편에서 현자였으나 바보로 살아
마침내 삶과 죽음까지 하나가 되도록 온 몸으로 그것을 밀고 갔던
한 사람이 있으니
그를 미워하면서 사랑했던 우리는 이제 그를 보내며 영원히 우리 마음에
그를 남긴다“.
갔다 왔는지 않왔는지 어떻게 아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