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 나비가 날아들어 수정되어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스님들의 성적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꽃에 비해 불임 꽃이 사찰에 적절하다.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꺾꽂이로 번식하며 인가의 정원에도 심는다. 꽃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연한 보라색에서 흰색으로 점점 자기의 몸 색깔을 바꾼다. 유순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꽃말은 변심 냉담 거만이니 이중인격자를 비유하기도 한다.
오막살이집은 나만의 공간이라 좋다. 잊고 살던 사람으로부터 전화라도 오는 날에는 더없이 행복하다. 찻잔을 앞에 둔 것처럼 통화가 대화로 변한다. 원인도 없이 애기를 갖지 못한 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한 아름의 수국화를 안고 찾아올 곳이 있어서 좋다며 노란 우산을 쓰고 현관을 들어선다.
그런 친구에게 오래 전부터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아직도 하지 못했다.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 주고 싶은 게다. 자손이 귀한 집에서는 수국을 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을 닮아 자손이 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아파트에 사니 수국을 가꿀 정원이야 없지만 품에 안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아린다. 자식 없는 게 어떤 약점도 아니며 꼭 있어야 한다는 절대적 조건도 아니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들의 정서로 볼 때는 자식이 하나쯤 있어야 한 가지 걱정은 덜지 않을까 싶다.
그 한 가지 걱정이 뭔지는 사실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함께 느끼며 공유하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권리다. 그런 면에서 아이가 없는 이 친구는 뭔가 한 가지쯤 손해를 보고 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
이런 나와는 달리 친구는 정작 자식이 없는 것에 그리 연연 해 하지 않고 취미 생활과 운동으로 자기를 가꾼다. 나이 쉰이 다 된 여인에게 이슬처럼 맑다고 한다면 나이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 친구는 순수하다.
아이 몇을 키우며 목소리는 거칠어지고 교육비 부담으로 휘청거린 보통 사람에 비해 성품이 유하다. 주는 대로 받고 보이는 길만 가겠다는 게 이 친구다. 이런 면에서 많이 퇴색된 내 안의 나를 본다. 아이 둘을 키우다가 하나로 줄어버린 나는 세상에 대하여 투정만 늘었다. 회의와 좌절로 나를 학대하며 아파하기 바쁘다.
‘나도 내 몸을 받은 아이 하나쯤 낳아 보기라도 했으면...’ 불쑥 뱉는 친구의 음성이 아쉬움을 비켜가지 못했다. 낳아본 그 자체도 부럽다는 심정을 드러낸 것은 긴 세월동안 정을 나누며 지냈지만 처음 듣는 회한이다. 이 친구는 추구 하는 게 없는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묻어둔 친구의 속내까지는 들여 다 보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 했다. 그랬다. 나만 아팠던 게 아니고 처음부터 자식을 갖지 못한 친구나 나나 우리라는 두 이름은 언제까지나 아플 사람들이다. 생각 하나에 묶여 흐트러진 삶의 형태 따위는 사소한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국화를 좋아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다. 이유 없이 생기지 않은 아이가 갑자기 생길 일은 아니다. 새삼스레 간절해야 할 불확실성보다 친구의 심연이 더 소중하다. 둘을 가졌다가 하나로 남겨진 나도 아프지만 한 번도 갖지 못한 자기의 삶도 서럽다는 친구의 눈에서 이슬이 비친다.
그러면서도 나를 보면 힘을 보태주고 싶다는 말이 고맙다. 우리에게 먼 훗날까지 나눌 수 있는 약속은 많다. 삶이 서투른 나를 부끄럽지 않게 포용해 주는 보배로운 친구에게 시시때때로 의지를 한다. 지치지 않고 나를 챙겨 주는 그의 가슴에 고마움을 얹지만 오늘 따라 이 친구가 더없이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