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경기 호황으로 국민소득 4만불 시대를 연 거제의 역사에 포로수용소와 가난했던 서민들의 삶은 이미 구전으로 남은지 오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황폐한 땅 거제를 동경하는 사람들도 있다.
섬사람들의 넉넉한 인심과 순박함이 있어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그녀는 해방 후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서민들을 위해 구호활동을 펼쳤던 홍탐실(83) 여사다.
그녀는 1960-70년대 거제지역최초의 여성사회봉사단체인 ‘주부교실’의 초대회장으로 또 가난한 굶주린 이웃을 위해 헌신한 여성운동가로 명성이 높았다.
거제지역에 최초로 여성사회봉사단체를 만들기 까지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역경은 거제지역사회봉사의 시발점으로, 또 여성사회봉사의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그녀가 거제와 인연은 맺은 것은 지난 1955년, 반공포로출신으로 귀순한 남편이 거제에 정착하면서부터다.
결혼을 하기 전 강원도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녀는 당시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남편을 소개 받는다.
그녀의 남편 故장락봉씨(18년 전 작고)는 함북 청진에서 창진시 재무계장에 재직했던 석학이었지만 평소 민주주의를 동경하면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산군에 입대, 남한으로 내려와 귀순한 인물이다.
그녀의 남편은 창진시청 근무시절 동료였던 거제토박이 신용계씨의 도움으로 당시 거제군에서 발주한 공사 책임자로 일하면서 공사대금 대신 받은 구호물품과 밀가루 등 대량의 식량을 지원 받았다. 당시 구호물품과 식량은 큰 목돈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재산은 크게 늘어나기는커녕 점점 궁핍해졌다. 남편이 공사대금 대신 받아온 식량을 굶주린 이웃을 위해 쾌척했기 때문이다. 당시 거제지역은 한국전쟁이 종결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터라 전쟁고아와 석방포로가 넘쳐나고 있던 상황이라 구호물품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거제지역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짓기로 마음먹고 서울에 남아있던 자신 소유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고현지역에 대지 1,000여평을 매입한 뒤 건물을 짓기 시작 했지만 그녀의 꿈은 정부의 고아원의 설립허가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포기 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식량은 물론 헌옷가지 까지 구호물품으로 사용했다. 심지어 그녀가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는 일도 빈번했고 서울까지 올라가 구호물품을 구해왔다.

지난 1969년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만남을 맞이한다. 그녀는 열악한 환경 속의 거제시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때마침 새마을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열린 새마을지도자 연수에서 참가하면서 영부인인 육영숙 여사를 만나게 된 것.
그녀가 거제지역의 사정을 육여사에게 토로하자 육여사는 “교육청을 통해 지원 할테니 거제지역에 여성단체를 만들라”는 제안을 했고 그녀는 거제에 내려오자마자 거제지역 학부모 500여명의 회원을 모집해 거제지역 최초의 여성사회봉사단체인 ‘주부교실’의 초대회장을 맡게 된다.
훗날 주부교실 회원들은 거제지역 사회봉사에 헌신하며 급기야 몇 년 후 ‘거제여성협의회’로 거듭난다. 그녀는 “당시 혼자서 봉사하러 다니다가 동료가 생기니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 이었다”며 당시 소감을 설명했다.
즐거웠던 꿈도 잠시 그녀에게 고난이 시작됐다. 출산 후 잘못된 산후조리로 2년간 병상에서 생활해야 했고 퇴원한 후에는 갑작스럽게 쓰러진 남편을 위해 20년 가까운 세월을 간호해야 했다.

당시 그녀는 거제지역에서 남편의 암을 치료하기 위해 한겨울에 거제전역을 돌아 다니며 굼뱅이를 구하고 9가지나 되는 죽으로 남편을 간호하는 열녀 칭찬이 자자했다.
그녀는 남편을 간호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양곡상을 운영하고 그도 여의치 않자 세무서에 복덕방을 허가받아 생활하면서도 굶고 있는 이웃을 위해 몰래 식량을 지원하곤 했다.
그녀는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 2000년 상록회 활동을 마지막으로 사회봉사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며느리 박금순씨(45·여)가 그녀의 뜻을 이어 받아 거제지역 6개 장애·노인 단체에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녀는 현재 지난해 8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소규모 요양원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그녀는 “80평생 나보다 남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 하지만 그래도 아직 하고 싶은 꿈이 너무 많다”며 “앞으로 건강이 허락한다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