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는 거제사람이 조공을 바치듯이 통영을 드나들던 시절이 있었다. 똑딱선 타고, 아니 나룻배 저어 통영 지주들의 나락가마니 실어 건네던 때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실이 옛말이 되었다. 4차선이 뚫리고 하루에도 몇천대란 차량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만 보아도 금석지감이 새롭거니와 이제는 뭍엣 사람이 물건너와 품 파는 세상이 된 것이 분명하다. 경제면만이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그러리라.
나는 금년 상반기에 통영에 무슨 문학행사가 있다하여 미륵산 케이블카도 타볼 겸 통영엘 갔었었다. 오랜만에 남망산에도 올라보고 청마문학관에도 가보고 하였으나 한 마디로 그 잡답함이라니! 셔틀버스 한 대 없는 것은 또 그렇다 치자, 행사장을 찾느라 나는 우선 예술회관이 있는 남망산부터 찾았다.
그러나 회관에는 빈 방만 쥐 죽은 듯하고 사람 하나 없다. 나는 간 김에 옛동산에 올라 초정의 수택(시비)이나 보려 했지만, 옛 모습은 가뭇없고 땀만 흘리고 내려왔다.
다음에 갈 곳은 청마문학관(생가)인데, 나는 그곳에 관심이 컸다. 내가 소장했던 청마의 책 한 권이 이미 P시인의 이름으로 거기 전시돼 있었고, 내가 연전에 기증한 또 한 권 책이 거기 진열돼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점심은 먹었어도 여름 한낮 동충에서 멘데 길이 그리 만만한가. 몇십계단 올라서 당도한 문학관. 거기서도 행사의 여파인 듯 사람들이 분주하다. 내가 기증한 ‘에리아수필(エリア隨筆)’은 어데 전시돼 있는지 그것부터 궁금하다.
안에 전시돼 있다는 관장 말만 믿고 한참을 돌고 또 돌았으나 책은 어디에도 안보였다.
컴퓨터에만 매달려있는 젊은 관장보고 고작 “나 가네” 하고 나왔으나 오뉴월 염천에 그 높은 데까지 땀 흘리고 찾아간 보람도 없이 다리만 맥빠져 더 휘는 것이었다.
강구안을 돌아나오다 하얀 천막이 즐비하여 들르니 거기가 오늘의 행사장 아니가! 나는 그 후에도 내가 청마책을 기증한 시청부터 추적하여 직간접으로 수탐했으나 문학관에서 책을 넘겨받은 것만 확실할 뿐 영 오리무중이라 급기야는 기자를 동원하고야 그 익일로 책 찾았다는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전시효과나 노린 행사를 위한 행사면 또 모를까, 누구 누구를 내세워 지난 세월의 조박만 핥고 있었던 문학행사. ‘현재의 당위를 살리고 보다 진취적인 내일을 위하여 도약하라’ 그게 내가 들려줄 말이 아니었겠냐? 박경리가 왜 통영 용화사 밑에 묻히길 원했는지 우리 나이쯤 된 당시 통영에 있은 이라면 다 알만하리라.
기념사업회 사람들아! 청마가 고향이 통영이라 한 것은 당연한 일. 출생지에 생가나 문학관이 섰다고 호가호위 하기보다는 이제는 통영의 문학도 거제에 와 거듭나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통영서 ‘둔덕골 멋쟁이’란 말을 들었지만 이제는 그 ‘둔덕골’ 매김말도 사양했으면 한다. 통영 통영. 아웃사이더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