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각자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삶의 지향점을 향한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그런데 이렇게 노력할 기회도 없이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나의 삶이 결정지어 진다면 기분이 어떨까?
마치 아무런 의사도 표현하지 못하고 낙태 당하는 태아의 기분과 비슷할 것 같다.
옛날 여자의 삶은 남자에 의해서 결정됐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신분과 지위, 재산에 의해, 커서는 어떤 남편을 만나는가에 따라, 늙어서는 아들이 자라서 얼마나 출세하느냐에 따라 바뀌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여자들이 아들을 낳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영채는 어릴 적엔 아버지가 학교도 세울 정도로 꽤 부유했고 학문도 높으셔서 교육도 잘 받고 불편함 없이 살았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져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제자 중 하나가 강도짓을 해서 돈을 가져다 준다. 영채의 아버지는 그 돈을 받지 않았지만 강도의 누명을 쓰고 아버지와 오빠들이 감옥에 들어가면서 영채의 인생은 어둡게 변해갔다.
영채는 온갖 고난을 겪고 결국 투옥된 가족들을 돈으로 구해주기 위해 기생이 되었지만 돈도 받지 못하고 유일하게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인 형식을 찾았다.
하지만 그 당시 사회는 기생이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여자를 흔쾌히 아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었다.
무정하게도 형식은 어린 시절 은사의 딸인 영채를 버리고 좋은 조건을 가진 선형을 선택했다. 형식이 부와 겉모습만을 쫓는 속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누구라도 형식의 입장 에선 선형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지금 세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영채의 삶은 다행이 그렇게 일찍 끝나진 않았다. 자살을 결심하고 평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병욱이라는 신여성을 만나 것이 영채의 인생을 봉건적 과거로부터 근대적 여성으로 뒤바꿔준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영채는 병욱과 함께 일본 유학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떠나는 길에서 우연히 미국으로 떠나는 선형과 형식을 만난다. 그러나 삼랑진 수해에서 세 사람은 사랑보다 더 큰 이념을 깨닫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교육에 힘쓰기로 마음먹는다.
영채는 아버지의 삶을 따라 자신의 삶 또한 뒤바뀌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형식에게 의지해 다시 자기 삶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결국 영채의 삶을 바르게 고쳐준 사람은 병욱이라는 깨우친 여성이었다.
그것이 지금 시대를 예견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더 이상 남자 하나에 의해 여자의 삶이 결정되는 시대가 아니다. 물론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야 있겠지만, 남자에게만 의존하기 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고,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서도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시대다.
나는 이런 시대가 온 것이 반갑다. 아직도 예전처럼 남자에 의해서만 내 인생이 결정된다면 정말 화나고 억울할 것 같기 때문이다.
좋은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기 위해서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선택받기 위해 예쁜 인형처럼 꾸미고 얌전하게 앉아 있어야만 하고 사회 활동은 커녕 집안 일만 하고 있어야 하진 않을까?
평생 그런 무의미한 삶,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에게 의지해서 내가 아닌 그들을 위해 살기는 싫다. 물론 그들을 사랑하기야 하겠지만 내 삶을 결정하고 움직이는 주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으면 한다.
이제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노력으로 바꿔날 수 있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기 보다는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언제나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