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역사, 진실을 찾아서⑤
거제역사, 진실을 찾아서⑤
  • 거제신문
  • 승인 201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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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생/부산경남사학회 연구원

왜, 고려 때 거제현민들은 가조현으로 갔을까?

고려 때 거제는 왜구의 침입에 신음하고 있었던 섬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739년 전인 1271년 개경중앙정부에 의해 거제현의 송변·아주·명진현은 자기 땅을 버리고 진주현 영선현과 거창현의 속현 가조현으로 이주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왜구의 침략으로 갔다고 정사나 각종 지리지, 읍지 등에서 기록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실제론 사실과 전혀 다르다. 앞으로 거제현이 어떻게 내륙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몇 차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거제, 개경정부에 저항하다

변방 또는 절도(絶島, 육지와 떨어진 섬)라고 부른 거제는 고려 때 개경중앙정부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앙정부에 의해 '해적'이라고 부르고 잡아야 하는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거제에서 중앙정부를 위협하던 거제의 저항세력은 해적이 아니라 지방관의 수탈과 과중한 노동력 착취, 토지의 탈취 등으로 고초를 당하고 있었던 농민과 어민들이었다. 당시 이들은 고려의 사회·경제적 모순에 목숨을 걸고 싸운 저항군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비슷한 사례는 고려 인종 때 일어난 묘청의 난, 삼별초의 항전, 갑오농민전쟁, 1907년 의병전쟁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성정부나 일본은 농민군과 의병들을 '폭도'로 몰아서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럼 정사로 알려진 <고려사>에 거제의 저항세력을 '해적'이라고 실린 내용을 보자.

"남쪽 경계의 해적이 많이 일어남으로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응문(鄭應文)을 선무사로 임명하여 가서 이들을 타일러 깨우치도록 하였다(『고려사』권15, 인종 6년 4월)."

"겨울 10월에 동남해 안무사(東南海安撫使) 정응문(鄭應文)이 아뢰기를, "명진(溟珍)ㆍ송변(松邊)ㆍ아주(鵝洲) 세 고을의 해적 좌성(佐成) 등 8백 20명이 귀순하여, 이미 합주(陜州, 합천) 삼기현(三岐縣, 삼가(三嘉))에 귀후장(歸厚場)ㆍ취안장(就安場)과, 진주(晉州)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설치하여 그들을 정주하게 하였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하례하였다(『고려사』권15, 인종 6년 10월 임자;『고려사절요』권9, 인종 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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