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사실은 삼별초 항쟁군이 진도와 이들 지역의 중간 해상 교통로였던 거제도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확보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삼별초 항쟁군은 1271년(원종 12) 4월 진도를 비롯하여 30여 곳의 섬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다음의 내용을 보면 거제 현령이 삼별초에 의하여 잡혀가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11월, 무인(戊寅)에 중서사인(中書舍人) 권단을 원(元)에 보내어 하정(賀正)하였다. 삼별초(三別抄)가 거제현(巨濟縣)에 입구(入寇)하여 전함(戰艦) 3척을 불사르고 현령(縣令)을 잡아갔다. '고려사' 세가편, 원종 13년(1272) 11월.
기존 자료에 따르면, 1271년 이미 거제현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1272년 11월에 거제현령이 거제에 거주하면서 지방행정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처럼 거제현과 그 속현의 사람들은 왜구의 침략에 의해 가조현으로 가게 된 것이 아니라, 삼별초 항쟁군과 연결되는 고리를 끊긴 위하여 '강제'적으로 이주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제 백성들이 삼별초 항쟁군과 연결되어 있거나 동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중앙정부의 조치는 거제현의 모든 백성과 삼별초 항쟁군이 함께 정부에 대항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거제지역의 삼별초에 호응은 거제현과 그 속현 등의 토착세력과 하층 군현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들은 삼별초군이 내세운 몽고와의 굴욕적인 강화 교섭과 개경환도의 반대, 몽고와의 지속적인 항전, 개경환도 정부의 부인, 고려왕조의 정통성 및 자주독립국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운면에 거주하던 백성과 거제현민들은 삼별초 항쟁군의 진압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그 요인은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고려 말의 지속적인 왜구의 침략도 한 몫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