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22일 고금도에 도착했다가 1900년 2월 21일 해배되었다. 그는 1900년 8월 일본으로 가 박영효를 만나고 돌아온 후 9월 3일 경성에서 붙잡혔다. 이 군수는 11월 8일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906년 2월 1일 해배되어 육군 보법정위로 임명되었다가 육군보병 참령으로 승진했다.
이 군수의 후임으로 부임한 유과환(兪果煥) 군수는 1898년 8월 29일(9. 30 도임)∼1901년 2월 16일(4. 6 도임)까지 근무하다가 1901년 2월 16일 10개월 봉급을 차압당하는 벌을 받아 거제군수에서 물러났다.
1905년 2월 10일 홍천군수에 있던 유과환은 "포학하게 사욕을 채우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에서는 민첩하기 그지없고 이익에 눈이 어둡다보니 정사를 하는 데서는 일마다 모호하여 사나운 군교들이 지나치게 심히 횡포를 부리고 가난한 집들이 꼬리를 물고 망하여 흩어져 없어"진다며 봉고파직을 당했다. 그러나 나중에 유 군수는 죄가 없다며 징계를 면했다.
그 외 김희원(金熙元) 군수는 1901년 2월 17일(4. 6 도임)∼1901년 12월 9일, 이중철(李中喆) 군수는 1901년 12월 9일(1. 9 도임)∼1902년 4월 8일, 한응규(韓應奎) 군수는 1902년 4월 8일(5. 7 도임)∼1902년 8월 26일까지 근무했다. 이중철 군수는 1902년 1월 9일까지 부임해야 했으나 5월 4일까지 거제군에 도착하지 않았다.
일본군 기지 반대하다 쫓겨난 군수
권명호(權明浩·개명 권중훈(權重勳))는 1902년 8월2일(9.20 도임)∼1905년 2월 10일까지 근무했다. 권중훈은 1903년 8월 3일 정부의 농상공부가 일본회사에서 제작된 벼 수확 기구를 민간에 보급하라고 지시를 받자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필요없다고 권 군수에게 그 기구를 돌려보냈다.
결국 군수는 모두 환수하여 정부측에 전달했다. 또한 1904년 2월 22일 일본군이 송진포와 농소리 60리의 농토를 무단 점령하자 주민들의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권 군수는 정부의 지시대로 업무를 진행하지 않자 다른 구실을 핑계로 군수직에서 물러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