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포로 17만명 수용, 매춘·폭동·유혈사태 끊이지 않아 '아수라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폐쇄, 파란만장한 첫 번째 역사 '마감'

1951년 2월, 냉전시대 이념갈등 축소현장, 포로수용소에는 봄이 찾아오지 않았다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은 거제시 옛 신현읍, 연초면, 남부군 일대의 1,200헥타르 규모의 수용소를 설치한다.
그것이 바로 거제포로수용소다. 포로 2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였고 1952년 포로 분리작전이 실시되기 전까지 17만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들이 이곳에 수용됐다.
당시 최초의 포로수용소 터 잡기 공사에 참여했던 진성업(83·대한민국 무궁훈장 수군자회 회장)씨는 60여년이 지났지만 당시 상황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차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은 부산 양정에 있던 포로 200여 명을 LST(Landing Ship Tank·병사, 전차 등의 상륙용 선박)에 태워서 거제도 장평에 상륙시켰습니다. 중사로 재직 중이었던 나는 그들을 감시하던 20명의 경비대원 중 한 명이었지요. 그들을 데려다가 지금의 포로수용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200여 명의 포로들이 바로 거제포로수용소의 최초의 터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진씨는 포로수용소를 만들기 위해 과거 고현성 자리(현재 고현시장)를 허물었을 때 목격했던 일화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수용소를 짓기 위해 포로들을 동원해 고현성 자리를 허물자 그 자리엔 머리에 뿔이 난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
"모두가 기겁을 했습니다. 그렇게 큰 구렁이는 내 평생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었지요. 사람들이 고현성을 지키는 '구렁이 신'이라고 수근거렸어요. 그 구렁이를 미군들이 태워서 아주 앞바다에 버렸고 사람들은 그 후로 몇 년을 아주 바다에서 캔 조개는 입에 대지 못했습니다."

북에서 온 대규모 피난 여성들, '원 달러'에 미군에 몸 팔아 기아 연명
1951년 초 '알바니 작전'에 의해 최초의 포로들이 부산에서부터 수송되기 시작했고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가 거제포로수용소로 수송됐다. 그 중에는 여자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밤이 되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여자 포로들이 운동장에 나와 보초를 서던 미군들을 유혹했습니다. 얇은 철조망을 파고 들어갔는데 한번 들어간 미군들이 하룻밤 새에 진기가 다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결국 한국군과 유엔군이 번갈아 보초를 섰지만 '사고'는 끊이지 않았지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포로들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소위 '흰둥이' '깜둥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4 후퇴 때 북에서 대규모로 내려온 피난민들 중에서도 유엔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거제도 일대가 암암리에 거대한 기지촌으로 퇴락하는 비참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어둠이 내리면 북에서 온 여자들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원 달러'씩을 받고 미군들에게 몸을 팔았지요. 알고는 있었지만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말리지 못했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이것이 바로 공식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는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인분통 안에는 삶겨진 토막 시신' 친-반공 포로간 유혈사태 끊이지 않아

박씨의 어린 두 자녀의 고사리 같은 손에는 거제포로수용소의 안내도가 쥐어져 있었고 곁에 선 아버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지난 1983년 30년의 침묵을 깨고 거제포로수용소가 되살아났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설립하기 위한 첫 삽이 떠진 것이다. 총 사업비 60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공사. 15년간의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됐고 지난 1999년 10월 15일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문을 열었다.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해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했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해 2차로 개관을 했다.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해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누적관람객 수만 해도 600만명. 1999년 개관 당시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의 수익은 약 5천4백만원에 불과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총 누적수익 130억을 거둬들이며 거제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관광 시설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김두홍 포로수용소유적공원 팀장은 "아픈 전쟁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명실공이 거제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김 팀장의 말처럼 거제포로수용소는 거제 시민은 물론 거제시를 찾는 외부 관광객들에게 꼭 한번 거쳐가야 할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됐다. 이미 역사가 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힘으로 지켜져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로수용소는 지금 최첨단 테마파크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전쟁포로의 슬픈 역사, 4D 영상관에서 되살아나다
60년 역사의 포로수용소가 전쟁테마파크로 세 번째 부활을 한다. 총 사업비 315억원을 들여 지난 2006년 만들어지기 시작해 내년 5월 개장을 앞두고 있는 거제포로수용소 테마파크는 포로수용소 콘텐츠를 활용한 세계 유일의 평화 테마파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지터 센터, 세계평화미래관, 4D 특수 영상관, 무기사격체험, 야외병영체험코스 등의 시설로 건립되는 포로수용소 테마파크는 개관을 1여 년 앞두고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다.
포로수용소의 제 1기가 암울했던 과거의 재현이었다면 제 2기 현재 유적공원은 역사의식 고취의 현장이자 거제관광 산업의 현장이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제 3기의 포로수용소는 평화와 희망의 미래를 제시하는 테마파크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성공 여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하지만 하나의 역사 현장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변신을 거듭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