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승·고희준 '일제 나팔수'로 맹활약
이교승·고희준 '일제 나팔수'로 맹활약
  • 거제신문
  • 승인 201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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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생/부산경남사학회 연구원

[거제역사, 진실을 찾아서] 일제 나팔수로 나선 거제군수

반면에 윤상우 군수와 다르게 일진회나 민중들의 재산 등을 탐하여 승승장구한 인물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이교승과 고희준 거제군수다.

이교승(李敎承)은 1906년 6월 19일∼10월 9일 거제군수, 1906년 9월 8일 경상남도 진해만 군항지(軍港地) 조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윤상우의 후임으로 부임해 뇌물사건에 연루되었다.

1906년 경남관찰사 조민희(趙民熙)는 내부(內部)에, 거제군 일진회민(巨濟郡 一進會民)이 평민으로부터 돈을 빼앗고 가둔 일과 거제군수 이교승의 부정축재 문제를 조사하여 보고했다. 웅천군수 윤영옥(尹榮鈺)은 이 사건을 엄정하게 조사하도록 정부로부터 명령을 받았으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다시 진해군수 정해팔(鄭海八)은 두 사건을 조사하여 정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사건 이후 정부는 "웅천군과 거제군은 항만이 있는 중요한 지역이므로 양군의 군수들이 비록 임기가 만료되지 않았으나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웅천군수 윤영옥을 옹진군수로, 거제군수 이교승을 영평군수로, 영평군수 서상붕을 광양군수로 서임), 특별히 선발된 인원들을 대신 서임(전 참리관 신석린을 웅천군수로, 탁지부세무관 고희준을 거제군수로 서임)했다.

이 시기부터 친일내각으로 구성된 대한제국 내각은 일제의 요구에 따라 진해만 일대를 장악하기 위하여 친일적 성향의 군수들을 임명하게 되었다.

고희준, 학교 설립에서 친일파로 변신

1907년 2월10일 사립 거제보통학교의 설립을 주장한 고희준은 '거제 교육의 아버지'처럼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다.

고희준(高羲駿·1880년생·일본명 高島基)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독립협회 총대위원, 경성학당 부교사 등을 지내고, 1906년 일본으로부터 훈4등 욱일 훈장을 받았다.

그 이후 그는 거제군수(1906. 11. 19∼1907. 12. 30)로 재직하면서 진해만 일본군지 조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친일군수로 진출하고, 1909년 일진회 총무국 교섭위원 및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조례단에 참가했다.

또한 경술국치 이후 충남 신창·연기군수, 친일단체 국민협회·각파유지연맹 발기인·동민회 평의원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친일활동을 잘했다는 이유로 일본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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