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목민관 모습 보여준 윤상우 군수
참다운 목민관 모습 보여준 윤상우 군수
  • 거제신문
  • 승인 201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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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생 부산경남사학회 연구원

[거제역사, 진실을 찾아서] 그는 친일신문 매일신보에 "일본제국을 믿어서 무사도화의 세계 인류라 하는 확신만 있을 뿐이다"라고 일제의 무사도정신을 극찬하고, 3.1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에게 경고문을 반포하여 총독부에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특히 고희준은 창씨개명에 조선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스스로 '창씨개명 상담소'를 만들어 창씨개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고희준은 거제 교육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신했다.

다음 이재성(李在性) 거제군수(1908∼1910)로 있다가 1910년 조선총독부 군수로 발령 받아 1910년∼1920년 함양군수, 1921년 함안군수로 재직하다가 퇴직했다.

이원호(李元鎬)는 양산군수를 거쳐 거제군수(1910. 1. 8∼1911. 10), 김해군수(1911∼1918) 등을 지내고 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했다. 경술국치 이후 거제군수 출신자들은 일제의 '성은'을 입어 총독부 군수로 계속 재직했다.

전태흥, '친일파 우두머리로'

거제군은 용남군과 통폐합되어 통영군으로 바뀌었다. 그때 마지막 군수가 바로 전태흥(全泰興·1868∼1918)이다. 그는 울릉군수로 있다가 이원호 군수 후임으로 1911년 11월 1일 임명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통영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일본 게이오의숙에서 유학하고, 1906년 8월 평양시경무서 총순, 1907년 1월 무안부경무서, 1908년 1월 마산경찰서 경부로 있다가, 1909년 7월 울릉도 군수로 전직한 인물이다.

그는 통영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본신문『부산일보』에서 "친일파의 우두머리로 매일 일본복장을 착용하면서 살고, 그의 부인 역시 일본복장을 입고 다니며 두뇌가 명석하여 군민의 기를 받고 있다."라고 평가를 받았다.

전태흥은 1916년 2월 창원군수, 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1918년 7월 밀양군수로 재직하다가 병사했다.
 
저항하거나 타협하는 목민관들

대한제국 전후 거제군수로 재직한 목민관들은 다양한 행적을 보여주었다. 이조현 군수는 박영효와 연류돼 종신유배형을 당해 쫓겨났다. 유과환·권중훈은 봉고파직되었으나 명예를 회복했다. 이재성, 이원호, 전태흥 군수는 친일반민족자로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했다.

반면에 유일하게 윤상우 군수는 일진회와 맞서 싸운 인물로 참다운 목민관의 모습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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