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한국정부는 일본군의 송진포 무단 점령을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시지에는 누락되어 있다. 여기서 필자는 한국정부, 경남도관찰사, 거제군수 등이 어떻게 일본군의 군사 행동을 대응하는지를 새로운 자료를 통해 추적하고자 한다.
이 사태에 이르자, 경남도관찰사 민형식은 1904년 2월 25일 매국노 이지용 외무대신에게 '일본병정이 군함에서 내려 산위에 나무 작대기를 박고 군함 왕래의 후망(候望·높은 곳에 올라가 적을 살피며 경계하는 일)을 위해 낮엔 연기를, 밤에 불을 피우고 포막(布幕·막차에 둘러친 포장으로 사람이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머물고, 해저에서 통하는 전선을 만드는데 마산항까지 통한다고 한다'는 거제군수 권중훈의 보고를 받았다며 보고서를 제출했다(慶尙南北道來去案, 1904. 2. 25).
하지만 이지용은 하야시 전권공사와 '한일의정서'를 체결해 미온적 태도로 일관했다. 이 의정서는 2월 27일 공포를 앞두고 있었으나 소급 적용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제군수 권중훈, 경남도 관찰사 민형식 등은 정부로부터 어떠한 회신을 받을 수 없었다.
1904년 3월 9일 경남도 관찰사 민형식이 이지용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송진포 정동임소(鼎洞任所)에서 군함 5척이 와 군병과 재목을 내려 논밭을 가리지 않고 영(營)을 만들고 바다 가까운 산에 포대를 만들었다고 하므로 직접 가 살펴보니 병형(兵形·군대의 형세)이 이러하고 인민이 떨어져 흩어진다'는 거제군수 권중훈의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1904년 3월 18일 권중훈 거제군수는 "송진포 정동리 임소의 보고에 의거 조사하니 일본군병이 전답을 가리지 않고 점령하여 막사를 짓고 산 정상에 포대를 설치하고, 그 동민의 집과 전답 값을 낙낙하게 보상하기 위해 관찰사와 창원감리서에 보고하였고, 감리와 일본령사가 와 조사하였으며 지금 군국사무와 외국병 상황을 직접 보고하라는 관찰사의 훈령을 받아" 외무대신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慶尙南北道來去案, 1904. 3. 18). 주로 일본군 포대가 설치된 곳은 대금산, 장목 관천산, 농소 망봉, 영등리, 황포 뒷산과 구미등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