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경우, 참된 신자는 갈등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지를 질문하게 되고, 정직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갈등하게 됩니다.
소설가 이병주 씨가 1972년에 발표한 <변명>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 탁인수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일제 말기에 일본의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밀고자의 제보를 받고 급습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묻기를 "너는 가족을 생각해 본 일이 있느냐? 너의 불충하고 불효하며 불손한 행위가 너의 가족에게 미칠 화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느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때 탁인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불효는 장차 역사가 보상해 주리라고 믿는다."
자신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한 희생과 자신의 가족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고통은 역사가 보상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탁인수는 사형장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탁인수가 죽으면서 한 말처럼 우리 한국의 역사가 장차 그의 희생과 그 가족들의 고통을 보상해 주고, 그의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을까요? 이 소설의 결론은 탁인수가 죽은 후의 한국 역사는 그의 믿음을 증명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후손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역사가 그 명예를 회복해 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것을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실화를 소재로 쓴 이철환의 「연탄길」이라는 책에 보면 이 점에 대하여 아주 적절하게 설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운전자가 길을 가는 행인을 차를 치고 도망을 갔습니다. 마침 그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그 사람을 병원으로 옮김으로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치고 도망간 뺑소니 운전자는 그 날 자기들이 살고 있는 빌라에 가스가 폭발하여 죽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작가는 이 이야기의 결말에 아주 흥미있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다보면 저런 우연이 있을까 하고 사람들은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생각보다 더 많은 우연이 있고, 생각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중략) 기적이나 단죄의 화살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관여하는 하늘의 섭리인 것이다."(22-26)
저자가 하늘의 섭리로 이해한 것을 우리 신자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공평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 생명이 무사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