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진포 이어 가라산도 점령
일본군은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다는 구실로 '한일의정서' 4조를 내세워 거제도 전역에 군사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904년 4월 6일 창원감리 이정태는 거제군수 권중훈의 보고를 받고 김가진 외부대신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권중훈 군수는 "거제군 남쪽 30리에 가라산이 있는데 산 정상은 옛날 봉수대를 설치했던 곳으로 동남쪽 해양이 잘 보이는 곳이며 그 아래에 탑포리가 있다.
음력 2월 12일에 받은 탑포 주민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 선박 2척이 주택 건축 목재, 각종 기계를 가득 싣고 탑포리 앞에 들어와 물품 일부는 탑포리 거주 손금준(孫今俊)의 경작지 30평 내에 옮겨서 우선 막사를 짓고 일부는 가라산 위로 옮겨 놓았다"고 보고했다(昌原港報牒, 1904. 4. 6).
4월 8일 경남관찰사 민형식이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1904년 9월 15일 권중훈 군수는 "저도에 있는 주민들이 일본군의 포대와 막사 공사로 인해 강제 이주해야 하는 처지에 있으며 일본군이 점령한 논밭의 수와 주택을 건축할 목재를 수리산에 쌓아 두었다고 성기운 경남도관찰사에 보고했다.
일본군은 거제도 내의 저도, 궁농, 구영등(현재의 구영), 가조도, 쌍근, 가라산 등지와 한산도, 견내량, 광리도, 고개도 등에 통신소, 포대 등을 설치했다.
이들 군사시설은 1905년 12월에 모두 완료됐다. 이들 지역은 러일전쟁을 대비하고자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제의 군사기지 확장에 대해 거제시지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또한 일제의 거제도 점령을 대한제국에서 생산된 각종 문서들을 참고하여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권중훈 거제군수가 일제에 의해 쫓겨나는 과정, 송진포 일대의 일본해군기지로 바뀌는 과정에서 한국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자세하게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