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한 외무대신 이하영은 1904년 5월 3일 내무대신 이용태에게 보낸 공문에서 "일본군이 점령한 토지와 가옥은 영조(永租)하지 말고 수가매차여(隨價買借與)하면 나중에 양회(讓回)받을 수 있을 것이라"라고 거제 송진포를 비롯한 각 지역의 일본 군용지 설치된 해당 군수들에게 일러두었다.
하지만 점령된 모든 토지는 일본 육·해군의 소유로 이전되었고 다시금 되찾을 수 없게 됐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바뀌었다. 특히 이하영, 이용태 등은 조선귀족으로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 남은 인생을 풍요롭게 살았다.
1906년 12월 20일 탁지부는 장목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인 병사들의 토지보상 중에서 미지급된 부분을 즉시 지급하도록 평리원에 요청했다.
탁지부에 따르면, 장목면에 거주하는 박여진과 최영언 등은 "1904년 정월에 일본인 병사 수백 명이 갑자기 장목면에 들어와 9개 동의 주민 모두 강제로 흩어졌다. 당시 군수였던 권중훈이 직접 그 형편을 살펴 한편으로는 창원의 일본영사관에 사실을 조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탁지부에 그 사실을 알렸다"고 말하고 "정부로부터 배상금 5만2,630냥 5전을 거제군 공금에서 지출해 민생을 안전케 했으나 미지급금 1만4,972냥 8전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관리들은 자기 사욕만 채운 채 출급할 뜻이 없고 또 횡령까지 하였기에 이를 한성재판소에 호소하고 평리원에 알려 이미 심판하게 하였지만 권세만 믿고 약한 자를 깔보면서 차일피일 미루기에 이를 탁지부에 청원하니 탁지부가 그것을 돌려주기를 바란다"고 관리의 부패를 지적했다.
이 사건은 친일 고희준 군수에 의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