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은 여기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하셨다. 비우당은 본디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4대 35년간 정승을 지낸 유관(柳寬)이 살던 집이다.
공은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선초삼청(鮮初三淸:조선 초기 세 명의 청백리)으로 장마가 들어 지붕에서 비가 새자 방안에서 우산을 펴들고 부인에게 '이런 날 우산도 없는 집은 어떻게 하지'하며 걱정했다는 일화가 용재총화( 齋叢話)에 기록되어 있다.
이 집을 이희검이 유관의 인격과 청빈생활을 흠모하여 살게 되었다. 비우당이라는 당호는 '옷이란 몸을 가리면 되고(의족이폐신:衣足以蔽身), 밥이란 배만 채우면 되고(식족이충장:食足以充腸) 집이란 비만 가리면 된다(가족이비우:家足以庇雨)'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거제에서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는 칠원(漆原) 윤공(尹公) 집안의 석보(石輔)가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그의 처 박씨는 사는 게 궁색하여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몇 가지 물건을 팔아 밭 한 뙤기를 장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석보는 "내가 관직에 있어 녹을 받거늘 어찌 농부의 몫인 땅을 가질 수 있으며, 전에 없던 밭을 장만했다 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어서 물리시오"하며 꾸짖어 되돌린 일이 있다. 석보는 청백리(淸白吏)로 녹선(祿選)되셨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관리의 본분이요, 갖가지 선행의 원천이자 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는 목민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부끄럽게도 민선자치시대 이후 거제시장 출신 3명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보면서 거제시민의 실망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