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에게 '토끼와 거북이' 동화를 읽어 주던 어느 엄마의 조그만 소원이었단다.
오늘은 비록 토끼 이겨라! 거북이 이겨라! 응원의 소리가 방앗간의 원동기 소리만큼이나 크게 울리고 있지만 자기의 읽어 주는 동화를 듣는 이 아이가 뛰어다닐 세상만은 토끼와 거북이가 손을 잡고 함께 좋아하는 세상이 되기를 천진한 엄마는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을 처음 만난 갈릴리 바다에서도, 남자만 오 천 명이나 되는 허다한 무리가 모인 빈들에서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외치고 또 외치는 맹인을 만났을 때도 예수님의 마음을 들끓게 했던, 예수님이 바라신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약성경의 보고 산상 보훈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주님이 바라셨던 첫 번째 세상은 율법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이었다. 당시 율법 준수를 최고의 명예로 여기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살인이 아니라 미움이 문제이며 간음이 문제가 아니라 여자를 보고 품는 음욕이 문제이며 도둑질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물건을 보고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이 더 큰 문제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는 미움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세상, 더 나아가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 되기를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 하셨던 것이다.
두 번째는 신앙이 살아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셨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여러 번 "외식하지 말라"고 책망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고, 사람보다는 물질을 더 중히 여기다가 주님께 책망을 받은 것이다.
그런 세상을 향하여 주님은 '물질에 목숨을 바칠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외치셨던 것이다.
어디에 더 큰 가치를 두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물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세상은 분명 문제가 있다.
거기다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히 여기는데도 문제가 있다. 신앙이란 진리에 대한 헌신이다. 진리라고 믿는 것이 잘못되었든지 그 헌신이 잘못된다면 그 인생은 오발탄과 같다. 그 신앙이 '바로 된 신앙' '살아있는 신앙'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셨던 것이다.
주님이 바라셨던 세 번째 세상은 '좁은 길이 넓은 길'이 되기를 바라셨다. 산상보훈 마지막에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잘 가지않은 길, 즉 남을 비판하기보단 이해해 주고 정죄하기보단 용서해 주는 세상, 하나님과 사람들에게도 무엇을 얻을까 나의 유익을 위해서 어떻게 이용할까가 아니라 도우려하고 섬기려하는 사람이 많아 이제 더 이상 좁은 길이란 이름이 합당치 않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세상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셨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런 주님의 소망을 제자 된 자들이 이루어주기를 더욱 바라셨다.
①법이 없어도 ②바른 신앙으로 ③섬김과 봉사를 마땅한 의무로 여기는 제자들이 넘치는 거제도, 경치가 좋아서 환상의 섬이 아니라 주님의 꿈같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제도가 되기를 축원하고 또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