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묻노니 마음의 도장이 어떻게 생겼는가! 허상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사회에 소홀하는 마음이 있을 때 나를 한번 보아야 할 것이다. 진실된 행동을 감추고 사회를 판단하지 말자. 서투른 판단에 마음의 도장이라 부르는 것에 벌써 우리 사회는 헛소리라 판단한다.
마음에 대한 이름은 마음의 구슬[心珠], 마음의 거울[心鏡], 마음의 등불[心燈], 마음의 달[心月], 마음의 근원[心源], 마음의 법[心法] 등 대단히 많다. 이것은 모두 이름을 붙여서 그 실체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에게 묻노니, '마음의 도장이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시작된 물음에서 답은 마음은 그 실체가 없다는 데 이른다. 마지막에 가서는 그 경지도 궁극이 아니라 아직 한 겹의 관문이 막혀 있다고 결론짓는다.
불교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하여 마음을 전해주고 전해받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인도에서 온 달마 스님도 문자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고 단순히 마음만을 전했다고도 한다. 세상 사람들의 도장은 온갖 재질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마음의 도장이란 알고 보면 그 어떤 모습도 아니다. 푸르지도 희지도 검지도 않다. 모나거나 둥글지도 않다. 글자도 전혀 없다. 그러한 이 마음의 도장을 누가 감히 전해 주고 전해 받는다고 하는가. 모두가 거짓말이며 틀린 말이다. 『금강경』에서도 이르지 않았던가.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다."라고.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긴 하지만 굳이 말한다면 마음은 텅 비어 공적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고 그려낼 수 없다. 그래서 '무수한 세월 동안 평탄하여 아무런 다른 형색을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마음의 도장'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는 것은 모두 헛소리다. 비유한다면 마음의 본래 공적한 성격은 활활 타는 화롯불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난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마음의 신묘한 도리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비유가 대단히 절실하고 근사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찾으면 없지만 듣고 느끼고 하는 이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그렇게라도 표현해 본 것이다. (무비 스님이 가려 뽑은 명구 100선)
우리 마음의 대부분의 갈등이나 충돌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아집에서 비롯된다. 견해라는 것도 사실 나만의 색안경이다. 내가 보는 관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꼭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잘 안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만의 아집을 버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멈춰야 할 때 나를 멈추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주인 된 삶을 살 수 있다. 멈추고, 살피고, 알아차리는 부단한 수행을 해야 하겠다.
"나는 모든 견해에서 과오를 보니. 고집하는 일 없이 살피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노라." 마음의 갈등은 이제 내 마음 도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노력 한번 해야겠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