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반, 거제지역 축구 전성기
1920년대 중반, 거제지역 축구 전성기
  • 배창일 기자
  • 승인 201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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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다시보기④]1922년 둔덕우리회, 일반인에 전파…1940년대 이후 대회 사라져

거제지역 축구역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래된 축구는 친목회나 작은 마을단위에서 시작됐다. 당시에는 경기규칙이나 판정 등의 정확한 상식없이 진행됐다고 한다.

1922년 7월 둔덕우리회란 청년단체가 축구경기를 일반 청년들에게 알렸고, 매년 마을 대항전을 실시해 그 유행을 파급시켰다. 또 각 지역 청년회에서도 축구와 야구, 정구 등 중심으로 한 체육부를 신설해 체력단련과 친목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거제지역 축구의 전성기를 꼽는다면 1920년대 중반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거제읍면별로 청년회와 연맹체, 동맹체가 결성돼 항일운동과 친목회 등이 급격히 증가했던 시점이다.

1924년 8월 7일 장승포 뇌전단(雷電團) 주최로 이운보통학교(현 장승포초등학교)에서 거제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참가단체는 거제구읍(巨濟舊邑) 여수군(如水軍), 연초면 천곡(泉谷) 오월군(五月軍), 이운면 장승(長承) 소년군, 이운면 장승포 뇌전군 등이었다.

우승의 영광은 뇌전군에게 돌아갔다. 당시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2,000여명의 관중과 관계자들이 모였다고 하니 축구경기에 대한 지역민들의 열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축구경기에 대한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결승전 종료 직후 도착한 여러 단체의 요구에 따라 곧바로 제2회 대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참가단체는 이운면 고현 계룡군, 이운면 지세포 배영군(倍英軍), 구읍 여수군, 천곡 오월군, 장승 소년군, 뇌전군 등이었다. 2회 대회 우승은 여수군이 차지했다.

거제축구대회는 또 다른 조직인 거제체육단을 결성하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 각 지역에 존재했던 체육단을 규합해 민족운동과 체력단련 등을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1925년 12월22일 연초 보명강습회에서 체육단 오월단(五月團)을 중심으로 준비위원회를 개최했다. 준비위원 옥상목(玉相牧)씨의 사회로 발기회를 열고 선언·강령과 소집 규정을 발표했다.

거제체육단 강령은 1.대중해방전선에 요소인 체적훈련을 목표로 항상 전위가 되기를 기함 2.각종 기능을 장려하며 진취적인 기상과 협조적 정신을 함양함 3. 정의를 좋아하며 반동세력을 박멸함 이었다. 참가단체와 대의원은 오월단 옥상목·반청·정혁씨, 삼봉단(三峯團) 옥치학·정행규씨, 비호단(飛虎團) 정규필·옥찬석·윤원씨 였다. 거제체육단의 결성은 지역 체육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1926년 1월2일부터 3일까지 둔덕 우리회 체육부 주최로 하둔 광야에서 전 거제 제1회 축구대회가 열렸다. 참가단체는 여수회, 동산단(東山團), 계룡단, 광선단, 용진단, 우리회 갑을조 등 모두 7개 팀이었다. 우승팀은 여수회였다.

이후 1939년 8월까지는 거제체육단을 중심으로 거제축구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1940년대 이후부터는 일제의 강제노동과 농민·농촌말살정책 등으로 축구대회 개최가 어려워졌다. 일제는 체육단이 민족의식과 항일운동을 전개한다는 이유로 대회개최를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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