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앙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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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신문
  • 승인 201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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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본 부엌은 다목적 공간이었다. 음식과 난방은 기본이고, 부녀자들의 작업장이면서 밤에는 목욕간도 되었다. 시집살이가 힘들 때 며느리가 눈물 훔치던 곳도 부엌이었다.

부엌의 중심은 아궁이다. 아궁이 위 부뚜막에는 물을 담은 사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조왕중발 혹은 조왕물그릇이다. 어머니께서 아침 일찍 부엌에 들어오시면 맨 먼저 하시는 일이 그릇에 새물을 갈아 놓고 손을 모아 비는 일이었다.

조왕신은 조왕할매, 조왕대신, 조왕대감, 조왕각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부엌신이다. 옛날 우리 가옥에는 집안 곳곳에 신(神)들이 살았다.

최고 대장신이 대들보에 성주신, 큰방에 삼신, 부엌에 조왕신, 장독대에 천룡신, 마당에 터주신, 우물에 용왕신, 광에 업신, 뒷간에 측신, 대문에는 문간신이 자기 구역을 정해 놓고 길흉화복을 관장했다.

재미난 설정으로 대문신의 처가 조왕신이고 첩이 측신인데 두 여자가 앙숙이라 서로 내왕하면 탈이 난다고 했다. 이는 음식하면서 변소에 들락거리지 말라는 스토리 있는 경고다.

아궁이와 가장 연관이 있는 것이 불(火)이다. 따라서 조왕중발에 정화수를 매일 챙기는 것은 불조심의 의미가 담겨 있다. 화재가 일어나기 쉬운 절집에서 용(龍)을 모시는 것도 용은 우리말 '미르' 곧 물과 같기 때문이다.

조왕신은 음력 섣달 스무 사흗날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한 해 동안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고해바치고 설날 새벽에 돌아온다. 이런 설정은 여자들을 입 막아 두려는 음모일지 모른다.

애 먹이는 남편 욕하고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를 욕했다가는 조왕신이 옥황상제께 일러바쳐 다 들통 난다는 위협이다.

지혜로운 여자는 조왕신이 하늘로 올라가기 전날 입과 유감이 되는 아궁이에 엿을 발라 입이 붙으면 말을 못해 잘못한 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런 해학적인 풍습은 아궁이가 살아지고 부엌이 현대식 입식주방으로 바뀌면서 조왕신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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