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명물이 탄생하게 된다.
일명 '돗드시장' 또는 '도깨비 시장'이라 불린 서양(양키)시장이 그것이다. 포소수용소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 이 시장은 유엔군의 군수품이 외부에 유출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거제 지역민은 섬 생활을 하면서 외부문화와 접할 기회가 드물었다. 당연히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며 순박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거제도에 밀려 온 피난민들은 달랐다. 이들은 일찍부터 개화문화를 받아들여 상업 등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피난민들에 의해 군수품은 무한정 유출됐다. 유출된 군수품으로 연초면 관암마을 앞 논 약 3만3,0571㎡(1만 여평)와 사등면 사곡리 삼거리 인근 약 3만3,0571㎡(1만 여평)에 대대적인 시장이 형성됐다. 이 시장을 '돗드시장' 또는 '도깨비시장'이라 불렀다.
이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카메라 초콜릿 통조림 커피 양주 양담배, 비누 등의 생활품을 비롯해 군복 군화 군용식기 등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포로를 감시하는 유엔군은 제네바 협정에 의해 포로들을 특별 대우했다. 이것을 이용해 포로들은 피난민들과 짜고 군수품을 빼돌렸다. 포로들의 식량과 피복을 저장하던 장평보급창고에 들어가 보급품을 차에 싣고 나왔다.
또 운행중인 보급차량에 올라타 보급품을 길가에 떨어뜨리면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처리를 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이 공공연해지자 일부 지역민들도 그들과 같이 보급품을 파는데 가담하기도 했다고 한다. 포로들은 군수품을 팔아서 시계나 금가락지 같은 귀중품을 가졌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한적한 농촌은 큰 변화를 겪었다. 극장을 비롯해 '댄스홀', '홀 하우스' 등의 유흥장과 점포가 곳곳에 생겨났다.
주민들은 피난민들로부터 배운 상술을 활용해 양공주장사를 비롯, 술집 등의 가게를 만들었다. 당시 포로수용소 주위에는 약 3,000명의 양공주들이 미군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유엔군으로부터 군사정보를 얻어내는 공산 첩보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돈이 넘쳐나자 '개가 미국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군용 사지를 개조한 옷이 학생복과 신사복으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부산 국제시장 등에서 거래되던 군용품이 모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유출된 물건들이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 정도였으니 거제도는 어떠했을지 미뤄 짐작이 가능하다.
'돗드시장'의 어원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당시 포로수용소 사령관이었던 프란시스 돗드 준장이 1952년 포로들에게 납치됐다가 4일 만에 석방된 일이 발생했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빗대 당시 서양물품으로 가득했던 시장이름을 '돗드 시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돗드시장'은 '도깨비시장'으로 변화됐고, 이 명칭이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한 비정상적 시장을 뜻하는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게 됐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