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석불상 수준작 '오량석조여래좌상'
고려 석불상 수준작 '오량석조여래좌상'
  • 배창일 기자
  • 승인 201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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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다시보기⑩]1972년 도 유형문화재 48호로 지정…상체보다 하체 높고 큼직

▲ 오량석조여래좌상. 지난 1972년 도 유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됐다.

오량석조여래좌상은 사등면 오량리 절골에서 1950년경 석불암 앞쪽 산 밑을 개간하던 사람에 의해 발견됐다. 출토 당시 목이 부러지고 귀와 코, 손가락 부분이 약간 훼손돼 있었다.

하연좌대와 상연좌대 사이에 8각 좌대가 없이 상하 연좌대 위에 좌불하고 있었다. 얼굴은 새로 칠해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계란형의 단아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견편단의 불의는 비교적 얇은 편이고, 옷 주름은 밀집형을 이루고 있다. 왼손은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린 이른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나타낸 석가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반듯하게 각진 어깨와 양감이 풍부하지 못한 세장한 상체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는 상대적으로 높고 큼직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대좌에서도 보여주고 있는데 중대 간석을 잃어버렸지만 연화문을 새긴 상대와 하대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원추형으로 8각 대좌 양식이 꽤 남아 있다.

오량석조여래좌상은 이처럼 신라 말의 석불 양식 계열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 석불상의 수준작으로 예술적 측면에서도 크게 주목 받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불상 보존을 위한 불사를 해 석불에 회칠이 두껍게 발라져 있다.

지난 1971년 2월 동아대학교 김동호 교수와 이용헌 과장이 현지를 답사했고, 이들의 노력으로 1972년 2월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됐다.

석불의 형태로 볼 때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며 규모가 크고 넓은 어깨, 안정된 연좌의 모습이 우수하다. 다만 목이 부러지고 상하 연좌대 사이에 있던 좌대가 없는 것이 흠이다.

오량석조여래좌상이 많은 참배객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영험함이 많기 때문이다. 석조여래좌상은 발견 당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토지 개간을 하던 농부의 괭이에 의해 석조여래좌상이 출토 되었을 때 암자였던 이곳보다 규모가 큰 통영 안정사로 옮기려 했다. 인부들이 들어서 석조여래좌상을 옮기기 시작하였는데, 10미터 정도 간 후 잠시 쉬었다가 다시 들었는데 석조여래좌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더 많은 인부를 동원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아 다시 위로 옮기려고 하니 들려 지금의 자리에 위치했다고 한다.

1988년 10월4일 국가에서 보호각을 지어주었지만 그곳에 안치하지 않고 '삼천불조오십삼불전'이라는 석굴에 안치돼 있다.

거제에서 이 정도 규모의 큰 석불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불교문화와 지역 문화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1170년 고려 의종이 정중부의 난으로 둔덕면 거림리에 쫓겨 와서 살았다. 폐왕성은 석불이 있는 뒷산이며 그 산 아래가 거림이기 때문에 오량석조여래좌상은 폐왕성과 폐위가 된 폐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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