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예술랜드 개장 후 'IMF 직격탄' 맞아…인고하며 장가계, 특허 개발 '몰두'
힘들수록 작품 만들기에 온힘 쏟아…세계적인 명품 테마파크 건립 '마지막 꿈'

- 난과 돌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궁금하다.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은데….
△ 19살 때 체신공무원이 되면서 고향 거제를 떠났다. 고향은 능포다. 장승포초등학교와 거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동아대학교와 숭실대학원을 마쳤다. 난과 돌과 인연을 맺은 것은 80년대초 한아통신에 가서였다. 이때 탐석과 채란에 푹 빠졌다. 난을 즐기다 난한테 먹힌 셈이다.
그리고 박환기씨의 그림과 수석 전시회를 보며 그 분의 작품세계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81년 서울 남한강에서 발에 채이는 돌의 질감에 매료되기도 했다. 마침 당시 난 수입 자율화로 인해 자생란 붐이 일었다. 그래서 돌과 난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 이 세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후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능곡재 난원 그린벨트 3,000평을 임대했고 15년 동안 수집과 배양에 몰두했다. 그리고 91년부터 5년간 해금강에서 풍란 되돌리기 사업도 진행했다.
예술랜드는 93년 착공해 95년 7월 개장을 했다. 5톤 트럭 200대분의 작품을 싣고 고향에 와서 개장을 한 것이다. 하지만 개장 후 바로 IMF를 맞았다.
- IMF는 당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직격탄이었다. 이 대표의 경우 더욱 힘들었던 것으로 안다.
△ 솔직히 방법이 없더라. 전시품이 소프트웨어라면 전시관이 하드웨어인 셈이다. 하드웨어를 갖추기 위해 대출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IMF가 터졌다. 그리고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거제시와 매각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선거논리와 편 가르기가 개입되면서 본질이 왜곡되고 변질돼 포기를 했다. 당시 시에서 다독거려줬어야 했는데 오히려 넌더리나게 했다. 하지만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었고, 더욱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 그렇다면 예전에 방송도 탔던 '장가계'라는 작품은 그런 힘든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 몰입과정에서 시작된 것인가?
△ 솔직히 주제가 다른 새로운 작품을 통해 당시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했다. 장가계를 안 만들었으면 못 견뎠을 정도로 힘들었다. 사람이 울분에 차면 망가지는게 건강이더라. 그래서 '모든 게 내 잘못이다'며 마음을 추스르니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 힘든 일을 겪은 이후 작품 활동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어려움을 이겨낸 이야기 등을 구체적으로 좀 더 듣고 싶다.
△ 그 동안 특허 개발에 몰두했다. 3개를 출현했는데 그 중 '석부작용 입석과 제조방법'은 특허를 받았다. 그리고 '실생산수화'와 '원경 작품'은 국제 특허 등록 요청이 오는 것을 보면 조만간 특허 등록이 될 것 같다.
△ 600여 개의 작품을 한데 모은 것이다. 작업은 7년 정도 걸렸다. 작품이 바닥에 하나씩 따로 있었을 때는 연출미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동산을 만들어 재구성한 것이다.
쉽게 말해 스토리텔링을 통한 구성미를 가미한 것이다. 제주도 설문대 할망 전설과 서불이 동남동녀 500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캐러왔다는 전설 등이 있다.
나는 서불의 전설을 재현하고 싶었다. 각 작품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붙인 것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씩 붙이다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고 관람객들도 반응이 좋았다.
관람객들이 붙여준 이름도 꽤 있다. 솔직히 거제와 먼 지역일수록 내 작품이 더 높게 평가되고 있는 현실이 서운하다.
- 시조시인으로도 등단을 했다. 그리고 능곡이라는 호를 쓰게 된 배경도 듣고 싶다.
△ 84년 현대시조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도 현대시조 발행인으로 있다. 그 동안 300여 편 정도 작품을 쓴 것 같다. 그러면서 신한국인상(대통령상), 효당문학상, 거제예술상 등 제법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능곡이라는 호를 쓴 것은 고향을 항상 마음속에 그린다는 의미에서였다. 능곡은 옛 능포 옥수동마을을 불렀던 명칭이다.

- 35년 가량의 세월을 작품 활동에 매달려왔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후회되거나 하지는 않나.
△ 한 분야를 내가 이뤄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장가계를 완성했고, 삶을 살면서 이렇게 원도 한도 없이 몰입해봤다는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육체적 고통과 부채의 시달림은 솔직히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지난해 10월 요관 결석으로 몸에 구멍을 여섯 개나 뚫었다.
우스갯소리로 '육천거사'라고 칭한다.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재로 세계적인 명품 테마파크를 만드는 것이다. 90%의 소재는 확보하고 있고 나머지 10%는 현장에서 제작이 될 것이다.
이성보 대표는 중국 남조 양나라 사람 안지추가 쓴 '안씨가훈'의 '孔(공)子(자)爲(위)東(동)家(가)邱(구)'를 마지막으로 인용했다. 그 유명한 공자도 그의 고향에서는 그냥 이웃집 노인네로 불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정작 고향 거제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수 십년후 거제에서 만난 것은 2006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