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3·1운동 시발점, 아양리 당등산
거제 3·1운동 시발점, 아양리 당등산
  • 배창일 기자
  • 승인 2011.0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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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다시보기⑪]1919년 4월 2일 밤 태극기 제작…3일 정오 200여 명 모여 '거사'

일제식민지 시대 거제도 독립운동의 시발점은 어디일까?

1919년 기미년 음력 4월3일 이운면 아양리 바닷가 당등산(현 대우조선해양 부지)에서 '대한독립 만세'의 깃발을 올리며 독립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거제도내의 지식인과 개화문화를 선도하는 신지식인, 지방부호의 협력 아래 피 끓는 젊은이들이 앞장섰다.

이 운동의 주동 인물은 이공수, 윤택근, 이주근, 이인수, 이주무, 윤사인씨 등이다. 또 기질적으로 다혈성을 가진 옥포 주동찬씨 등의 유지들과 옥포 천주교 신도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거사를 위해 4월2일 밤 태극기를 만들고, 4월3일 당등산에서 대한독립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는 격문을 마을 곳곳에 붙였다.

4월3일 정오때쯤 200여명의 민중이 모이자 윤택근이 행사 사회를 맡았고 주동인물들은 지형이 약간 높은 곳에 올라섰다. 이윽고 사회자가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당등산이 떠나갈 듯 모두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등산에 모인 민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울분을 터뜨렸고 모두 아주장터로 내려왔다. 이날이 마침 아주장날이라 많은 군중이 합세해 만세를 불렀고 그 함성은 민족의 한으로 온 장터가 떠나갈 듯 울려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헌병들이 미친 듯이 총을 쏘며 달려왔다. 그러나 때마침 비가 갑자기 쏟아져 헌병들의 사격은 중지됐고 그 틈에 군중들은 뿔뿔이 흩어져 몸을 숨겼다.

주종찬과 옥포지역 주민들은 배암바위 모퉁이 길을 달려 옥포로 가면서 계속 만세를 불렀다. 아주 장터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주동자들과 주민들은 일본헌병과 대치했고, 인명 피해를 우려해 해산했다.

일본헌병들은 앞잡이를 이용해 주동자 색출에 나서 아양과 옥포일대를 샅샅이 뒤졌고 그 다음날 윤택근을 비롯한 여러 명의 청년들이 검거됐다.

당시 아주와 아양리는 도내에서 유일한 개화의 중심지였고 부와 힘의 집결지였다. 거제의 토호들이 살고 있던 중심마을로 거제를 대표할 만한 재력과 새로운 문물의 개화로 발전된 곳이었다.

또 고려시대부터 아주현 치소가 있었던 곳이어서 오랜 역사 속에 토착 지방세력과 지역민의 협조 아래 대중의 지지를 받는 활동에 용이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에 대한 침략적인 반일감정과 애국적 사상이념을 지닌 우국지사들이 많이 있었다.

내 고장 다시보기는 잊혀져가는 우리지역의 역사, 문화, 유적 등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시민들과 자라나는 지역 아이들에게 지역 사랑과 거제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기획된 코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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