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필꽂이엔 주인 없는 연필이 가득하다. 수업을 마치고 뒷정리하다 보면 주인을 잃고 애처로이 버려져 있는 연필이 두세 개 나온다.
그걸 하나둘 주워 담다 보니, 어느 새 연필꽂이에 가득하게 모인 것이다.
간혹 아이들이 다음날 와서는, ‘아, 여기 있었네. 잃어버린 줄 알았지 뭐예요.’ 하면 다행이다.
꼼꼼해서 제 것 확실히 챙기니 기특하다 싶어 머릴 쓰다듬어 준다. 그런데 대부분 누구 것이냐는 물음에 ‘몰라요.’가 다반사다.
잃어버리고도 아예 내 것인 줄조차 모르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애타게 찾으려하지 않는다. 주인을 찾아주려면 ‘괜찮아요. 필통에 다른 연필 많거든요.’ 하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아이들의 필통을 열어본다. 대부분 가득 채워져 있다.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이층 필통이다. 아래 칸에도 빈틈이 없고, 위 칸에도 연필과 지우개가 여분으로 더 들어 있다.
일반연필을 비롯하여 샤프연필, 색연필, 형광펜, 사인펜이 색색의 옷을 입고 가지런히 누워 있다.
난 아이들에게 웬만하면 샤프연필을 쓰지 말라고 당부한다. 특히 저학년은 강제로 못쓰게 한다. 그럼에도 샤프연필은 아이들에게 인기다. 모양과 가격, 색깔 등에서 연필보다 다양하고 고급스럽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샤프연필은 깎아 쓰는 불편함을 덜어주고 있어 편하긴 하다. 하지만 연필심이 가늘어 손가락에 힘이 조금만 주어져도 쉽게 부러지는 단점이 있다.
아직 필체도 제대로 안 잡혀 있고, 연필을 쥐는 힘이 덜 생긴 저학년에겐 무리다 싶어 나의 강제성은 아이들의 투정에도 요지부동이다.
연필은 잃어버려도 찾을 생각을 않는데, 샤프연필은 잠시만 사라져도 옆 아이들을 일어서게 하고, 방석을 뒤집어보는 등 소란을 피운다.
이것만 봐도 연필은 뒷전이다. 하물며 몽당연필은 말해 무엇 하랴. 연필꽂이엔 몽당연필이 태반이다. 버려진 것들을 깎아두었다가 간혹 필통을 가져오지 않으면 내어준다.
그걸 반복하다보니 자연히 몽당연필이 된 것이다. 손가락 길이만큼 짧아질 때까지 쓰지 않아서인지 몽당연필이라는 말을 아이들은 모르는 것 같다.
문방구에 들렀다. 아이들에게 주려고 몽당연필을 끼워 쓸 수 있는 대롱을 찾았더니 가는 곳마다 없다고 한다.
아마도 찾지 않아서 없을 것이고, 굳이 몽당연필을 쓰자면 폐품이 된 볼펜대를 이용하면 될 터라 안 만들어내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웃인 일본 아주머니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다. 몽당연필을 끼어 쓰는 대롱이다. 앞전에 몽당연필 얘길 한 적이 있었는데, 잊지 않고 본국에 다녀오면서 챙겨온 것이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일본은 아직도 그 물건이 건재해 있는데 우리나라엔 없는 것이 아쉬웠다.
호기심을 보이며 대롱을 달라는 아이들에게 단호하게 안 된다 했다. 몽당연필을 가져오면 주겠다고 했다.
반드시 본인이 쓴 연필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얼른 갖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은 샤프를 제쳐두고 연필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몰래몰래 샤프를 쓰던 아이도 대롱을 갖기 위해 연필을 잡았다. 며칠이 지나자 한 아이가 연필을 내민다. 약속대로 짧아진 연필을 대롱에 끼워주었다.
연필 한 자루만큼 길어진 모양에 흡족해 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먼저 받은 친구가 부러운 지 제각기 연필에 힘을 가한다.
가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외면한다. 얼른 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대롱을 내어주지 않을 참이다.
언제까지 대롱에 끼운 연필로 글을 쓸지는 알 수 없다. 호기심에서 벗어나면 대롱에 끼워 길어진 몽당연필의 위력은 약화될 것이고, 일본에서 이곳까지 건너온 대롱은 어느 구석으로 밀쳐져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
마음이 씁쓸하다. 미미한 물건이지만 아이들이 학용품을 아끼고 소중해하는 마음이 우러난다면 얼마나 값질 것일까. 나의 의도를 아이들이 잘 알아 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