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운동 왜 일어나나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운동 왜 일어나나
  • 이영주 기자
  • 승인 2011.07.0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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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탄압하던 '간도특설대' 핵심으로 친일행적 뚜렷
해방 후 국군 편입, 제주 4·3사건, 6·25 흥남철수작전에 공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을 둘러싸고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 측과 시민단체연합회 및 거제시의회 측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김백일 장군의 과거 친일 행각 등을 이유로 '동상 철거'를 시민단체연합회와 거제시의회 측은 요구하고 있지만 기념사업회는 '김백일 장군은 10만 피난민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맞대응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백일 장군,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논란의 핵심은 무엇이고 동상철거 운동이 가열되고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김백일 장군의 친일 행적을 규정하는 가장 뚜렷한 것은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에서의 활동이다. 간도 특설대(間島特設隊)는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 · 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한 독립군 토벌 무장조직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친일인명사전 기록에 따르면 간도특설대는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명분아래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조직을 진압하는 부대였던만큼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기도 했다.

간도 특설대에는 그러나 당시 만주국에 살고 있던 친일 군인들 다수가 소속됐고 독립운동과 항일운동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던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중에 핵심이 바로 동상 건립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김백일 장군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씨는 "간도특설대는 독립군 토벌 부대 중에서도 가장 악질부대로 분류된다. 김백일 장군은 간도특설대에서 가장 주도적인 활동을 한 인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등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그대로 국군 지도부가 됐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 4·3 사건 등에서도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김백일 장군 역시 마찬가지의 행보를 걸었다. 광복 후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마친후 중위로 임관됐다.

6·25전쟁 발발 후 육군 제1군단장으로 전쟁을 치루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흥남철수작전 때 10만명의 피난민을 해상으로 수송한 공적이 후손들로부터 평가되고 있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운동을 대거 탄압하였기에 현재 알려진 간도특설대 소속 인물들 대부분은 친일파로 규정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씨에 따르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일본군 대위 경력 논란으로 인해 일본군에 복무해도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 놓았으나 간도특설대의 경우 독립군 말살이라는 임무와 활동이 특히 악랄해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상황이다.

1인 시위로 거제시의원들의 동상 철거 촉구 운동을 이끌어낸 옥영문 의원은 "해방 후 친일 인사들에 대한 심판이 있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그 인사들이 그대로 소위 핵심부에 그대로 등용됐다. 비통한 우리 역사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부대의 창설요원이 해방 후 육군 제1군단장에 임명됐다. 참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동상'을 세웠던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측은 "김백일 장군이 한국전쟁 당시 흥남 철수과정에서 반대하는 미군을 설득해 10만 피난민들을 배에 태워 남하시킨 영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어 "김백일 장군을 부정하는 것은 김백일 장군을 육군제1군단장으로 임명한 당시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도 강조하고 있다.

시민 김모씨는 "누군가에는 생명의 은인이겠지만 민족의 역사에서는 악질 친일파다. 자신들의 은인을 동상으로 만들어 기리겠다는 사업회 측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 집 앞마당도 아닌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동상을 세우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의회는 지난달 28일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고, 시의원 7명은 4일부터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가두시민서명운동'에도 나섰다.

한기수 총사위원장은 "김백일 장군 동상이 철거될 수 있도록 시의원들이 나서서 시민들에게 문제를 인식시키고 그 심각성을 알려야 한다는 취지로 가두시민서명운동을 전개키로 했다"고 말했다.

피난민의 은인(?)이라는 이유 하나가 조국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민족 반역의 핵심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사람의 '반 민족적 전력'를 가볍게 덮을 수 없다는 시민정서가 김백일동상 철거 운동의 핵심이다.

■   간도특설대는?

항일 독립운동 탄압...108차례 토벌 진행

간도특설대는 1930년대 후반 간도협조회, 신선대와 함께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 항일세력을 탄압한 3대 조직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간도협조회는 주로 전향한 항일세력들이 중심이 됐고 신선대는 경찰 산하 특수조직이었던 반면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정규 특수부대로 당시 만주국 최강의 무적부대로 불렸다.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옌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시작으로 같은해 12월 15일 출범했고 송석하, 김찬규(김백일)가 부대 창설 핵심요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김백일은 간도특설대에 최후까지 근무하다 일제가 패망하자 간도특설대 해산업무에까지 종사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특설대 설립목적은 백두산지구의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고 반만, 항일투쟁을 진압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1940년대에는 중국 열하·하북성 일대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 항일투쟁을 진압하는 등 간도특설대는 일본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항일련군, 팔로군 그리고 재만 조선인의 반일운동을 전문적으로 탄압했던 조선인 친일군사조직으로 그 이름을 날렸다.

특설대원 총 740여 명 중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으로 이뤄졌다.

일제 패망 때까지 일본군과 합동 또는 단독으로 간도(연변)지구, 열하성 지역, 허베이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의 토벌을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항일독립군 및 민간인 172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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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2011-07-12 04:30:59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7]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8]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나그네 2011-07-05 04:57:08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걸고 흥남을 탈출해서 남한행을 감행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 물론 단순한 피난민들도 있었겠지만 ...
백선엽, 김백일은 개인적 야욕이 강한 사람들이다.
김백일이 불의의 사고로 죽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김백일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그네 2011-07-05 04:48:42
김백일(金白一),본명 김찬규(金爛奎), 일본식 이름: 金澤俊南
일본 패망 후 김찬규에서 김백일로 개명함
만주 지린성 옌지에서 태어났으나 본래 집안이 함경북도 명천군이어서 국군 초창기에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의 백선엽은 군부에서 평안도 출신 중심축으로,
김백일은 함경도 출신 중심축 역할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