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해는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알을 궤에 담아 바다에 버린다.
궤가 동해 아진포까지 밀려왔고 까치가 궤 주위를 맴돌며 울기에 한 할머니가 궤를 주워 열어보니 아이가 있었다.
까치가 궤를 돌봤다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떼 내고 '석(昔)'으로 성을 삼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신라 말, 당나라로부터 불법을 전수한 보양(寶壤)대사가 귀국하여 새로운 절을 지을만한 터를 찾고 있었는데, 어느 산을 지나는데 산허리쯤에서 까치가 땅을 쪼고 있어 그 곳을 파보니 오래된 벽돌이 무수히 나왔다.
대사는 그 벽돌로 절을 세우고 '까치 작'과 '산허리 갑'자를 써 '작갑사(鵲岬寺)'라 이름 지었다.
옛날에는 '까치산' 또는 '작갑산'으로 불렸던 산이 오늘날에는 '가지산'이 되었고, 작갑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편액을 내린 후 '운문사'가 되었다.
세시풍속에 음력 7월 칠석(七夕)이 되면 까마귀와 까치가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 동쪽과 서쪽으로 헤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는데 이 다리가 '오작교(烏鵲橋)'다.
칠석이 지난 후 까마귀와 까치 머리에 털이 벗겨지는 이유는 머리를 밟고 지나간 탓이고, 칠석날 아침에 오는 비는 만남의 눈물이고, 저녁에 내리는 비는 이별의 눈물이다.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며 길조(吉鳥)로 여겼던 까치가 이제는 애물단지로 변하고 말았다. 잘 익은 과일을 쪼아 수확도 하기 전에 흠집을 내어 못쓰게 하는가 하면, 전신주에 지은 집 때문에 정전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 밉상인 까치를 칠석(올해는 8월 6일) 때만이라도 좀 곱게 봐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