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 바다, 눈물로 정복했다
삶의 터전 바다, 눈물로 정복했다
  • 거제신문
  • 승인 2011.08.2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제 해녀의 역사를 찾아

▲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 해녀들의 '물질'은 보통 한번에 5시간 정도 계속된다. 때문에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 수면 위로 수십번을 올라왔다 내려가곤 한다.

① 100년 거제 해녀…그녀들은 강했다
1900년대 초, 제주해녀들 '원정물질' 와서 거제에 정착
노예적인 삶 등 당시 생활 조건 열악…현재 196명 활동
거제 해녀, 아직은 그 이름이 생소하다. 해녀하면 제주로 통하는 일반화가 팽배한 탓이다.

그만큼 제주는 해녀에 대한 역사성과 고유성을 맘껏 자랑한다. 해녀박물관을 만들어 관광상품으로까지 내놓았고, 매년 해녀학교를 통해 해녀의 맥을 이어가고 교육, 홍보도 하고 있다. 해녀=제주는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4면을 바다로 끼고 있는 대한민국 두 번 째 크기의 섬 거제에도 바다를 평생의 장으로 살아온 '바다여자'들이 많이 살아왔고 또 살고 있음도 당연할 터다. 이름하여 거제 해녀다.

이들은 척박한 조건에서도 자신과 가족의 삶을 굳세게 지켜오고 있다.

현재 거제 해녀는 시에 나잠업 신고 기준으로 196명이다. 거제토박이 출신 해녀들도 있지만 제주에서 넘어온 해녀들이 거의 다수다. 거제나잠협회 김애영 회장에 따르면 거제 해녀 역사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00년대 초 소위 '원정물질'에 따라 제주해녀들이 거제바다를 찾으면서 하나 둘 거제에 정착하게 된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내 뿌리를 내리고 일가를 이뤄 이제 '거제사람'이 돼 버렸다.

김애영 나잠회장(53)은 "20대에 제주를 떠나 남해안 일대에서 물질할 당시 현지인들의 텃세와 구박이 심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현지 해녀들이 물질 때 제주해녀는 따돌렸어요. 당장 어촌계에 가입을 안 시켜주니 해산물이 풍부한 바다에서 물질은 애당초 불가능했죠. 어휴~ 말도 마세요. 지금은 거의 90%가 제주에서 온 해녀들입니다."

제주에서 건너 온 해녀들이 초기 정착하는 과정에서 토박이 거제 해녀들과 많은 갈등을 겪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는 100여년 전 제주 해녀들의 원정후 정착과 별도로 자생적 거제 해녀가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연구와 비교 검토를 통해 거제의 특유성을 찾는 작업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평가다.

거제 해녀들이 척박한 삶의 조건을 극복해 온 과정도 확인되고 있다. 1960년대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등은 거제 해녀의 삶을 간간히 소개했다. 고리대금업자들에 저당 잡힌채 노예적 삶을 강요당하고 있고, 융자금 지원이 이루어지자 활력을 얻어 획기적으로 천초 생산고를 올렸다는 등의 내용이 보도됐다. 바다작업 중 상어에 물려 죽은 한 해녀의 이야기도 실렸다.

당시 거제 해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또 거제 해녀들의 삶의 조건이 열악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거제 해녀, 그녀들은 척박한 조건을 극복하며 강인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자식들에게는 이 일을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한다. 조만간 거제에서 해녀 맥이 끊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엿한 직업인이자 거제지역사회의 구성원인 거제 해녀, 거제의 역사적·유형적 자산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희귀직업, 험난한 직업에 따른 곱지않은 시선을 뒤로하고 그녀들은 생활인으로, 어머니로, 지역사회구성원으로 당당한 삶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녀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거제시가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을까?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거제인 2011-08-31 14:29:53
거제시는 해녀를 관광 상품화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것을 요청합니다. 관광 상품은 가까운곳에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