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한때 잘 알려진 중견 소설가와 일본 문학을 중심으로 한 역사기행을 한답시고 흩어진 열도를 해맸던 적이 있었다.
역사문화를 잘 간수하기로 이름 난 터라 많은 사료들을 접할 수 있겠지만 되도록 자연 속에 드러난 길을 따르는 처지여서 전시되거나 보관된 역사와는 다른 여정이었다.
대마도로부터 오키나와로부터 고도(古都)를 지나 북쪽으로 이르는 동안 단연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의 선대를 기억하기 위해 유족들이 만들어 세웠을 비석(碑石)이고, 그 비석을 밝히는 비문(碑文)이었다.
대부분 연인(戀人)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의 행간으로 채워 진 비문들은 때로 일찍 떠나보낸 가족이나 친구와 전우까지 망라한은 엄청난 문학의 이정표로 세월의 돌덩이를 깎아 내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의 비문에 담긴 숱한 삶의 애환과 기념비적 족적은 연가(戀歌)의 바탕이 되고, 세계 속에서 아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일본문학의 근간이 되었다.
각별히 비교하자고 나온 생각은 아니지만 눈을 돌려 이 지역 거제를 보면 고장의 역사와 정서를 담아 지방 고유문화와 가치를 담을 그릇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거론하면 곧잘 전쟁과 주거와 문화예술이 등장하지만 그 역사의 편린이 도자기든 민속이든 의술이든 간에 우리가 미구에도 필요로 하는 삶의 보편성이 망라된 가치라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로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과 집단적 이기심에 사로 잡혀 역사의 잣대를 코밑 가까이에 두고 보다 크고 엄중한 판단의 가치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굳이 거제 뿐만은 아니겠지만 지난 전근세사와 관련된 역사를 상대로 정의롭지 못한 사업을 주장하는 경향들이 늘어난다.
혹자는 애향심이 지나쳐 내 땅에 내 맘대로 하겠다는 발상까지 가세하여 올바른 고증이나 합의 절차마저도 생략한 채 밀어부치기가 일쑤고 적잖은 시비거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임진왜란을 필두로 나라의 안보와 선대들의 희생을 기리고 유적을 보존하는 일은 보다 엄중하고 냉철한 가치판단과 분수에 맞는 시설을 요한다. 거제에는 아직도 찾아 보존해야 할 유적이나 전적지가 무관심에 묻혀있고 당연히 제 품격을 갖추어야 할 기념비도 작고 왜소하기 짝이 없다.
이러기에 얼마전 재출범한 옥포대첩기념사업도 올바른 공원 위상 못지않게 거제사연구회라도 함께 만들어 무턱대고 현수막부터 들고 나오는 사업성 러시를 경계해야 한다.
다행히도 일부 인사들이 유배문학의 사료들을 찾아 해석하고 올바른 지방 역사의 재해석에 몰두하는 열의를 갖는다는 소식도 있다. 이 소중한 분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혜안과 다수의 합의를 거친 역사의 새로운 위상들이 등장할 때 거제의 올바른 역사문화가 세워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