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해녀, 거제해녀 역사의 시작
제주해녀, 19세기 말부터 타지역 진출해 또다른 삶 개척
수산물 잡히는 곳으로 영역 확대, 일본·중국·러시아까지…

日 어업 침탈, 잠수기업자 출연…시장경제 유입으로 출가해녀 등장
거제 해녀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거제 해녀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출가해녀(出稼海女)'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가해녀'는 해녀들이 제주도를 떠나 타 지역으로 보다 나은 수익을 위해 돈을 벌러 가는 것을 뜻한다. 억척스럽게 삶을 개척해 나간 제주 해녀들의 삶이 녹아있는 단어가 '출가해녀'인 것이다. 이들은 제주도를 떠나 먼 바다와 먼 나라까지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출가해녀, 즉 제주 해녀들이 타 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제주향토기'에는 '1887년 경남 부산부의 목도(牧島)로 간 것이 시초'라고 기록돼 있다. 또 1915년 제주군 서기였던 일본인 '에구치'는 '1892년 경상남도 울산과 기장에 출어한 것이 최초'라고 했다.
일본인 '마스다 이치지'의 저서 '제주도 해녀의 지지학적 연구'와 경상남도의 '제주도해녀입문제경과(1920∼1935년)'는 '1895년 경상도 목도(현재 부산 영도)로 진출한 것이 처음'이라고 적었다. 연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제주 해녀들이 출가를 시작한 것은 1890년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주 해녀들은 왜 바깥으로 물질을 떠났을까. 제주 해녀들이 출가물질을 한 배경을 살펴보려면 당시 제주도의 시대상을 알아야 한다. 1890년대 말, 제주도에 대한 일본의 어업침탈은 매우 심각하고 위협적이었다. 1883년 6월22일 체결된 '조일통상장정'으로 일본인의 조선 연해 조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인 잠수기업자의 출현은 제주도내 바다어장의 황폐화와 급격한 생산량 감소를 가져왔다. 제주 해녀들의 삶의 터전이 뿌리부터 흔들인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시장경제의 등장으로 돈이라는 가치가 삶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에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잇단 개항으로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돈의 가치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제주 해녀들도 경제적 활동수단으로 자신의 몸을 바다로 내던졌다.
해녀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1937년 기준 한반도 전역에 나간 출가해녀는 총 2,801명이며 절반이 넘는 1,650명이 경남지역에 집중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에도 1,601명이 원정을 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37년만 해도 5,000여명이 넘는 제주해녀가 출가노동에 나선 것이다.
출가해녀 현지 정착…거제해녀 모태 추정

이처럼 제주 해녀들은 바깥에서 더 왕성한 능력을 보여줬다. 제주 해녀들은 물질을 하며 잡아들일 수산물이 있는 곳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경상도를 시작으로, 남해·동해·서해 바다는 모두 대상이 됐다. 지금도 거제와 통영, 부산 다대포, 울산을 거쳐 남한의 끝 지점인 강원도 거진 바다에서 제주 해녀들을 만날 수 있다. 북한 땅이 된 곳도 제주 해녀들의 개척대상이었다. 서쪽으로는 황해도, 동쪽은 청진까지 뻗어갔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도 제주 해녀들의 활동영역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출가 물질에 나선 제주 해녀들은 제주에 다시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정착해 삶을 꾸려가기도 했다. 한반도 곳곳에서 제주 해녀들은 생명을 이어가며 또 다른 삶을 만들어갔다. 거제 해녀들 또한 제주에서 원정을 나갔던 출가해녀가 그 모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