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두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넌지시 귀띔해 두었다. 이번엔 조금은 색다르게 보내보자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도 깜빡한 것이다.
학원에서 강의를 듣던 중 옆 사람이 날짜를 물어왔다. 갑자기 물어오니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요일에서부터 날짜를 계산해 보니 오늘이 오 일이다.
‘아차,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네.’
저녁 먹고 가라는 친구에게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는 집으로 왔다. 남편과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일부러 저녁 준비를 하지 않았다. 으레 외식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저녁을 먹게 되리라는 짐작에서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남편의 전화다. 직원 부친의 조문을 가야 하니 혼자서 저녁을 먹으란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며 전화를 끊는다.
한편으론 야속하지만 나 자신도 잊고 있었으니 내심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생각을 바꾸었는지 같이 외출을 하자 한다. 후한이 두려웠던 걸까. 예전 같았으면 토라져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바쁘게 준비하고 도로까지 나가서 기다리는 나를 보면서 참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이젠 같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아옹다옹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요즈음의 내 기억상태는 위험지수를 넘어섰다. 약속해 놓고서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어제 들은 말은 오늘쯤이면 잊어버려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세포가 말라가는 건 아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되니 심히 불안하다. 내일은 누구와 몇 시쯤 약속이 있는지 아침마다 달력의 메모를 확인해야만 한다. 바쁘게 일을 하다 보면 달력을 못보고 지나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낭패를 보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불안 증세까지 가세한다.
도대체 실없는 사람 만들어가는 건망증이 무엇인지 실체를 알기 위해 사전을 펼쳐본다.
건망증은 판단력, 통찰력, 장소, 시간, 사람에
대한 인지력 등 지적능력의 장해를 동반하는 신경조직 손상질환이라 되어 있다.
건망증은 단지 기억이 잘 안 되는 기억력 감퇴현상이라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물건을 사서 들고 있다가 다른 물건을 사면서 잠시 내려놓은 물건은 그대로 잊어버리고 온다.
비 때문에 가지고 나간 우산도 마찬가지다. 비가 멈추면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을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안개가 자욱한 날이나 비가
오면 미등을 켜놓은 채 자동차 문을 닫는다. 한번은 멀리 나들이를 가면서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었다.
삼 일만에 돌아왔는데, 새벽 네 시였다. 주차장에 얌전하게 세워진 차를 보니 반가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의 기척도 없고, 지나치는 차도 없었다. 적막 속에서 구조원을 기다리는 심정은 참으로 참담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며 그러지 말자고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다가도 내릴 때는 깜빡해 버리니 구제불능이다. 뭐든 잘 잊어서 낭패를 보지만 때때로 건망증도 필요함을 느낀다. 안 좋은 일은 빨리 잊는 게 상책이다.
남편과 마음 상한 일도, 친구와의 아픈 기억도 금시 잊어버린다. 나쁜 기억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니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바보처럼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마음 편할 때도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잊어버려야 할 기억들이 더러 있다. 모든 기억을 다 모아둔다면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 것인가.
좋은 기억은 남겨두고 나쁜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는 장치가 두뇌 속에 장착이 되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 그래도 하루 전에 한 약속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