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할머니운동의 창시자인 독일의 ‘트루데 운루’ 할머니가 ‘노부모와 더불어 살며 공양하는 한국의 전통적 삶의 질이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 이야기이다.
옛날에야 농업노동력의 필요로 생긴 대가족제도로서 3-4세대가 한 지붕 밑에서 살갗이 맞닿는 가족공동체 생활이 가능했지만, 산업사회로 이행한 지금에야 3세대가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된 지 오래이다.
가족들은 핵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발발이 찢어지고 만 것이 오늘의 풍속도이다.
아들·딸들은 시집·장가들고는 돈벌이 따라 뿔뿔이 헤어지고, 그 부부들마저 맞벌이로 한 집에 산다고 하지만 집만 함께 쓰는 자취생들처럼 되고 말았다.
부부 사이에 자식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릴 때는 탁아소로, 더 자라면 학교로 그리고 각종 학원으로, 가정으로부터 멀어진지 오래이다.
설사 휴일에 식구들이 한 집에서 쉰다고 하지만 모두가 컴퓨터 앞으로, 텔레비전 앞으로 또는 휴대폰으로 게임이나 문자 보내기로 각기 가상세계에 빠져들어 가족은 해체되고 만지 오래다. 게다가 보육문제 교육비문제 등으로 아이조차 낳지 않으려 하니 나라에서 신경을 쓸 정도로까지 되었다.
한편 노부모들은, 평생을 바쳐 길러놓은 자식들은 민들레꽃잎처럼 떠나버리고 꽃잎 없는 줄기마냥 외롭게 남고 말았다.
혼자나 두 양주가 외로이 남아 있는 노인들은 늙음의 외로움만으로도 버거운데 거동이 불편하여 병들든지 화재가 난다든지 하면 보살펴주는 손길이 없어 속절없이 시체로 내동댕이쳐진 채 방치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서로 의지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는 말이다. 물론 크게 봐서는 지금처럼 서로 잘 의지하며 사는 시스템이 발달한 적이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영상전화다 이메일이다 하여 같은 시간대에 연락이 가능한 지구촌(global)시대가 되었으니 삶의 사회성이 잘 짜여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그렇지 못하고 정반대인 것이다.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가족 간에 대화가 두절된 지 오래고 부부간에도 겨우 잠자리나 같이 할 뿐…, 일년에 한 두 번 설이나 추석에 민족대이동의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식구들이 모인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로간에 그리웠던 정이나 나눌뿐 어디 그것이 살갗이 맞닿는 가족의 사회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사회성의 외연(外延)은 확대되었다고 하나 내연(內宴)은 공동화(空洞化)되어 속 빈 강정처럼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어차피 산업사회에서는 아무리 외롭고 불편한 생활이라 해도 지난날의 대가족제도로 회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돕고 의지할 수 있는 대안가족제도(alternative family system)라도 모색해봐야 하지 않을까.
일본의 도쿄 아라카와(荒川)구 닛포리(日暮里)에 있는 한 건물의 3층 식당에는 저녁식사에 30여명의 ‘대가족’ 식구들이 모여 앉는다. 80대 할머니에서 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 20대 젊은이 등 식구들은 젓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 집은 한 지붕 아래서 서로 모르는 가구가 독립된 주거공간에 살면서, 식당과 현관 등은 함께 사용하는 집합주택(collective house)인 ‘칸칸모리(일본식 다세대 주택의 하나)’로서 저 출산 고령화가 진행되는 일본에선 각자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연령이 다른 여러 가구가 공동의 생활공간에서 이웃 이상의 정(情)을 나누면서 가사(家事)를 돕는 등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는 스타일로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주거 스타일은 일본에선 1995년에 처음 소개되어 일본 전체로 확대되고 있는데, 친구를 만들어 노후를 즐겁게 보내고 싶은 노인들, 어린이를 편하게 맡기고 맞벌이 생활을 계속하려는 부부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노(老)·장(壯)·청(靑) 세대간의 교류와 육아 지원이 가능한 독특한 시도라며 계속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하니 괜찮을 법하다.
필자는 이런 주택제도를 ‘조립식가족제도(組立式家族制度)’라고 이름 붙여봤다. 이런 대안가족제(代案家族制度)라도 도입해서 외로운 노인, 맞벌이 부부 그리고 자라는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장(場), 피붙이는 달라도 서로가 정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삶의 방법을 모색해 볼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