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거제소에 남겨진 거제인들의 발자취 ②
거창군지, 거제인 집단이주는 왜구 침달 아닌 삼별초의 난 때문으로 기술
거제현과 거창현 합해 제창현으로 명명…명확한 이주 인원 등 사료 부족
거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시대 이후 중앙에서 지방행정의 수반을 파견했음에도 국가의 보호보다는 내·외적으로 통제와 수탈의 대상이 돼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40년 전인 1271년(고려 원종 12년)은 거제의 많은 수난사 가운데서도 가장 기억될 만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던 때다. 거제의 주민들이 정든 고향 땅을 떠나 머나 먼 육지로 옮겨간 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에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왜 당시 거제지역 사람들은 피난을 떠나야 했을까.
또 기록에 남아있는 것처럼 거제인의 집단이주가 1271년에 이뤄진 것일까. 이에 본지는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된 사실과 향토사학자 등의 도움을 받아 총 4회에 걸쳐 거제인들의 집단이주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다.
거창군지 '삼별초의 난 때문에 거제현 피난'
거창의 지역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옛 거제인들의 집단이주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거제지역의 옛 문헌에는 고려시대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가 왜구의 침략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거창의 문헌에는 삼별초와 왜구 때문에 피난을 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거창군의 시대별 사항을 집대성한 거창군지에는 '제창현의 소멸과 거제환도'라는 제목으로 옛 거제인들의 집단이주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왕실의 국가통제력이 약화돼 도적이 사방에서 일었고, 삼면 바다를 통해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들은 바닷가는 물론 육지 깊숙한 곳까지 침입해 많은 피해를 입히던 때였다.
특히 고려 원종 때는 환도문제를 놓고 배중손과 김통정 등의 일부 무신들이 무력항거를 통해 남해안을 장악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한 시기였다.
거창군지에는 '고려 원종 12년 거제현은 삼별초 군사들에게 땅을 뺏기고 가조지방으로 피난을 와 환도 할 때까지 약 150년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돼 있다.
왜구에 보다는 삼별초에 의한 피난이 옛 거제인들의 집단이주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왜구에 인해 땅을 잃고 집단 이주를 했다는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는 다르지만 거제인들의 집단이주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인지되고 있다.
이주숫자, 이주형태 등 남아있는 사료 전무
당시 거제인들은 아주현(현 거창군 남하면 아주)과 송변현(현 거창군 남상면 송변일대), 오양역 일대에 머물며 질곡의 삶을 이어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옛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는 역사적 사실로 기록돼 있는 반면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거제를 떠나왔는지, 그 형태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사료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다만 피난민 중에는 제씨, 옥씨, 반씨, 신씨가 많았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이들 중에는 정치 경제상으로 호족에 속하는 상층계급도 있어 그들의 영향력이 강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둔마리 벽화고분의 경우에도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거제도 호족들이 남긴 유적이라고 추정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특히 거창지역 전체가 거제현과 거창현이 합쳐진 제창현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당시 거제인들의 큰 영향력을 반증해주는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제인들이 살았던 아주현, 송변현, 오양역은 모두가 거제현 안에 있었던 현의 이름이었다.
구본용 거창박물관 학예사는 "아주현과 송변현은 지금도 옛 이름이 바뀌지 않은 채 쓰이고 있다"면서 "제창이라는 지명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는 상당한 규모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거제환도 기록 일치, 거창지역에 많은 영향 끼친 듯
옛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한 반면 거제환도에 대한 기록은 일치한다. 거창군지에도 세종실족의 기록을 빌어 '세종 4년 임인(서기 1422년)에 옛 섬으로 돌아갔다'고 적어놓고 있다.
거창지역이 옛 거제인들과 역사적 운명을 같이한 기간 또한 150여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기간 동안 거제인들이 거창지역에 끼친 영향 또한 적지 않은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다만 내륙산간 오지로 정치적 귀양지였던 거창지역에 거제인들이 집단 이주를 떠났다는 사실은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단지 오고 감의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그 이상의 사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옛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가 역사적 승리자들에게 불편한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느냐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