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뒷산 명칭 거제골…척박하고 외진 곳에 터전 마련 질곡의 삶 이어가

지금으로부터 740년 전인 1271년(고려 원종) 거제인들은 행렬을 이뤄 집단 피난을 떠난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내륙으로 가기 위해 4일 밤낮을 걸어 도착한 곳은 바로 경남 거창.
거창 안에서도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골짜기에 거제인들은 마을을 이루고 150여년간 힘겨운 삶을 연명해 간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마을이름을 '아주'라 지었으며 기거하던 골짜기는 '거제골'이라 불렀다.
지난 4일, 거제에서 출발해 두 시간여 차를 달린다. 88올림픽고속도로를 통과하고 10여분이 지나자 눈앞에 거창군의 정경이 들어온다. 가장 먼저 당시 거제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아주마을로 향한다.
아주마을은 거창군 안에서도 매우 외진 곳에 속한다. 시가지라 할 수 있는 거창읍에서 30여분 차로 들어가니 '아주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끝이 아니다. 산골짜기 쪽으로 또 10여분을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웬만해서는 마을 밖에서는 마을의 존재를 알 수 없을 만큼 외진 곳이다.
'본현에 의하면 고려 원종 12년(1271) 거제가 가조로 옮겨와서 거제에 있었던 아주현을 가조의 서쪽 언저리에 둠으로써 아주라 이름 칭하였다. 삼별초 항전으로 인해서 거제군이 가조현으로 피난왔기 때문에 가조현이 잠시 없어지고 거제현이라 불렸다.'
아주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문의 내용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왜구의 침략으로 거제인들이 피난을 간 것이지만 실제로는 '삼별초 항쟁' 과정에서 중앙정부로부터 일종의 반군분자로 분류된 거제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는 게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거제인들이 집단이주해 150여년 동안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에도 그것에 대한 기록이나 유적이 전혀 없다는 점 때문이다.
현재의 아주마을은 38가구가 부락을 이루고 살며 대부분이 노인인구다. 아주마을에서 태어나 한번도 마을 밖에서 살아본 적 없다는 마을주민 오인식 할아버지(73)는 아주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눈치다.

"거제에서 사람들이 피난 와서 우리 아주마을이 처음 생겼다고 옛날 어른들이 그러긴 하데. 난 안믿지. 그렇다고 치기엔 비석 하나, 문헌 한 줄 남아있는 것이 없어. 그저 말뿐이니까."
취재 도중 오인식 할아버지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 험한 골짜기가 '거제골'이라고 일러준다. 거제골로 불린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고 아주 예전부터 골짜기를 아주마을 거제골로 불렀다고 한다.
꼬불꼬불한 외길을 따라 거제골로 들어가 본다. 5분쯤 올라가니 길이 험해 더 이상의 차량진입은 불가능해 보인다. 차에서 내려 산길을 올라가 본다. 아주마을을 켜켜이 둘러싼 거제골은 많은 이들이 집단으로 거주할 수 있을 만큼 넓은 토지다.
'아주마을'을 떠나 거창읍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거창박물관의 구본용 학예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구 학예사는 현재 거창에 남겨진 거제인의 흔적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료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먼저 털어놓는다. 고려 원종 12년 거제인들이 집단으로 거창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 거창에 남아있는 관련된 유적이나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남아있는 사료가 거의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수준이지요. 그 중에는 거창읍에 있는 둔미리 벽화고분을 거제인들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벽화 고분 바로 옆에 오래된 묘가 하나 있는데 규모가 상당해요. 당시 이주 거제인 중 거제 신씨의 조상묘라면서 몇 년전 후손들이 찾아오기도 했었습니다."
구 학예사는 이어 "거제 신씨의 조상묘가 맞다면 묘의 주인은 상당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규모가 꽤 있거든요. 피난이든 강제이주든 타지에서 들어와 숨죽이고 살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동원해 그 정도 규모의 묘를 만든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죠.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그저 추정일 뿐이지만 말입니다"라고도 덧붙인다.

구 학예사에 따르면 거창은 조선시대 때도 중앙정부의 세력이 미치지 않았다. 조선 때도 그랬다면 고려 때는 더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런 추측을 해본다.
박물관을 나서 곧바로 둔마리 벽화고분을 찾아 나섰다. 거창읍 둔마면 대촌마을이다. 20여분 차로 이동한 후 내려서 산길을 10여분 걸어 올라간다. 나지막한 한 정상쯤에 한눈에 보아도 오래되 보이는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이 보인다.
사적 239호 거창 둔마리벽화고분이다. 양쪽 돌방의 벽을 회칠하고 그 위해 흑녹갈색으로 인물이 그려져 있다고 안내문에는 설명돼 있지만 보존상태가 좋지않아 눈으로 식별은 거의 불가능하다.
둔마리벽화고분 전방에 구 학예사가 말했던 무덤이 보인다. 거제신씨의 조상묘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무덤의 규모는 가로 세로 약 2m 정도다. 무덤 양쪽에는 100cm 크기의 인물상이 서로 마주보고 무덤을 지키고 있다. 관리하는 이가 없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700년 세월속 비바람에 깎인 비문은 그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다. 거제신씨의 후손들이 조상묘를 찾으러 오왔다 비문 내용을 식별할 수 없어 발걸음을 돌렸다 한다.
거창에 거주했던 거제인들은 거의 그 흔적을 남기지 않은채 150여년을 거창에서 살다 고향인 거제로 돌아갔다. 사료나 자료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거창에는 아주마을이 있고 거제골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740년전 거제인들은 분명 거창에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