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된 느티나무가 수호하는 오량마을
300년된 느티나무가 수호하는 오량마을
  • 김경옥 기자
  • 승인 2011.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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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최고야]거제시 사등면 오량마을

통영에서 신거제대교를 타고 거제로 진입하면 거제를 상징하는 대형 아치가 눈앞에 들어온다. 오량마을 입구에 있는 거제관광안내소다.

오량마을은 조선중기의 거제 관방(關防)으로 조선시대에 축성한 오량성이 보전돼 있다.

1983년 시내버스가 개통되기 전까지만해도 둔덕면 상서·유지·거림마을로 가려면 오량마을 뒤로 나있는 산길을 따라 걸어다녀야 했단다. 오량마을은 거제로 들어오는 첫번째 입구였던 셈이다.

현재 오량마을에는 115가구 330여명의 주민이 살고있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벼농사, 시설채소, 정원수를 키워 생계를 꾸려 나간다. 평지로 비옥한 토질을 지니고 있는 평야지대라 과거에는 거제에서 가장 많은 쌀을 생산하는 마을이기도 했다.

80년대에는 비닐하우스 농사로 큰 수익을 거두기도 했지만 태풍 매미때 피해를 입은 후로 현재는 일부농가인 10여호만이 큰 토마토를 재배한다. 지금쯤 육모를 시작해 다음해 2월 중순부터 6월까지가 제철이다. 한해 생산량은 100톤.

나승준 오량마을 이장은 "생산되는 토마토의 대부분을 거제와 통영에 판다. 오량토마토 하면 조직이 조밀하고 당도가 높기로 이름났다"고 품질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낸다.

또 큰토마토 품종은 최근들어 많이 생산되기 시작한 유럽토마토인 완숙토마토에 비해 병충해에 취약하고, 수량도 적어 생산자들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말도 덧붙인다. 또한 동백·청가시·홍가시·단풍나무·금목서 등의 정원수를 키우는 가구는 34호다.

오량마을 입구에는 수관의 폭이 넓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300여년부터 마을사람들의 휴식처,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자로 마을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지금은 그 명맥이 끊겼지만 예전에는 나무 밑에서 마을을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오광대놀이도 했었다.

나 이장은 "내가 20살인 무렵까지 당산제를 지냈다"며 "마을의 복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입구에 나무를 심었다"고도 설명한다.

성내와 절골마을을 합해 형성된 오량마을은 토질이 비옥하고 기름지다고 해서 본래는 오양(烏壤)이라 했었다. 현재는 흙덩이 양(壤)자가 어질량(良)자로 바뀌었는데 그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절골은 절 아래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리 불렀는데 이 절터에서 밭갈이 하던 농부의 쟁기끝에 석불(경남유형문화재 48호 석조여래좌상)이 걸려 나왔다 한다. 지금은 석불이 나온 절터에 지은 신광사에 보관하고 있다.

거가대교 개통은 오량마을에게는 '섭섭한' 터닝포인트다. 거제를 찾는 이들이 장목으로 들어오니 신거제대교 입구인 오량마을은 '거제의 관문에서 후문으로 전락했다'며 서운해 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오량마을은 오량성과 석조여래좌상 등 귀중한 문화재가 있고,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둔덕기성과도 인접해 있다. 거제의 문화 유적과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마을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거제역사 일번지'를 향한 오량마을의 힘찬 발걸음은 흥겹다.

   
나승준 오량마을 이장

숨어 있는

거제관광안내소 아쉬워

"관광거제의 입구치고는 초라하다." 

마을앞에 위치한 관광안내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 이장은 올해를 거제방문의 해로 지정한 만큼 관광안내소에 들러 관광정보도 안내받고, 관광지도도 챙겨가는 관광객이 많지만 안내소의 공간이 좁고, 진입로도 협소해 거제의 이미지를 전하기엔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입간판 등이 적소에 배치돼 있지않아 대형 아취를 보고 호기심을 갖던 관광객일지라도 안내소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도 많고, 진입로의 경사가 심해 대형버스가 안내소로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아쉬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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