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인 집단 이주, 역사적 진실은?
거제인 집단 이주, 역사적 진실은?
  • 거제신문
  • 승인 201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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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조상의 발자취④ … 거제소를 찾아서

왜구로 인한 피난은 개연성 떨어져…삼별초 난이 직접적인 원인 인 듯

왜구 피해 고려말에 집중…원종 12년 왜구 침략 기록없어
▲ 현재 거창군 지도
'농사짓는 사람이 빽빽이 사는데/ 공연히 섬의 명칭이 남아있구려 / 계산은 은거한 선비들과 함께하고 / 부로들은 태평성대를 말하네 / 고요한 밤엔 우리에서 돼지가 울고/ 텅빈 처마엔 달이 기둥을 비추누나 / 술이 깨자 촛불을 부르고 보니 / 이제야 속진에 얽혔음을 알겠네.'
 
이 시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김종직의 '점필재 시집 제7권'에 있는 '가조현에서 자다'라는 작품이다. 이 시의 전문에는 '가조현은 거창(居昌)의 속현(屬縣)인데, 고려 시대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있을 때에 거제(巨濟)의 이민(吏民)들이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망쳐와서 부쳐 살았다'고 기술돼 있다.

이어 '본조(本朝·조선) 초기에 와서는 그들이 옛 고장으로 돌아갔는데, 지금도 이 고을을 거제라 부르고 있고, 또 마을 이름도 아직까지 아주(鵝洲)·송변(松邊)·오양(烏攘) 등의 칭호를 띠고 있다'라고 적혀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에는 옛 거제인들의 집단이주 기록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집단이주의 원인은 불명확하다. 사료상의 첫번째 원인은 왜구의 침략. 고려사는 '원종 12년(1271) 왜구로 인해 땅을 잃고 임시로 거창현의 가조현에 옮겨졌다'고 기술돼 있다.

하지만 고려사의 내용은 오류가 많다는 지적이다. 먼저 왜구에 대한 기록이다. 고려사 세가편은 '고종 10년(1223년) 5월 왜가 금주(김해)에 들어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왜구에 대한 첫 기록이다. 이후 충렬왕 16년(1290년)까지 왜구의 총 침략횟수는 총 9회 뿐이었다. 실제 거제인들이 집단 이주한 1271년에는 왜구의 침략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거제현에 왜구가 침략했다는 첫 사례는 고종 13년(1226년)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침입했다는 기록은 더이상 찾을 수 없다.

거제현을 비롯한 진해만에 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은 첫 침략기록 이후 약 124년만인 충정왕 2년(1350년)부터다.

고려사에는 '충정왕 2년 2월 왜구가 고성, 죽림, 거제, 합포에 들어오자 천호, 최선, 도령, 양관 등이 싸워 이를 쳐부수고 300여명을 죽였다. 왜구의 침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구의 침략이 처음으로 기록된 1223년부터 1392년까지 169년 동안 총 529회의 침입기록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공민왕(1351~1374년)에서 우왕(1374~1388년)때까지 37년간 총 493회의 침략기록이 남겨져 있어 왜구에 의한 피해는 고려 말에 절정을 이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따라 거제지역의 왜구 침략기는 1350년대 이후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삼별초의 난이 이주 원인…중앙정부의 강제 소거 가능성 커

왜구에 의한 집단 이주는 또 다른 문제점에 부딪힌다. 삼별초의 난이 그것이다. 다른 여러 문헌에서도 거제인들의 집단이주 원인을 삼별초의 난 때문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원종 때 거제현이 삼별초의 난을 피해서 관아도 여기로 우접하고 그대로 거제로 일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원종12년(1271년) 당시 거제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삼별초군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별초가 항쟁군을 일으켜 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하고, 고려와 원나라 군사가 이를 진압하던 시기여서 왜구가 침략할 정황은 거의 희박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삼별초 군은 몽고군과 중앙정부를 옹호하는 관헌들까지 모두 잡아가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원종 13년(1272년) 11월, 삼별초가 거제현에 입구하여 전함 3척을 불사르고 현령을 잡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는 왜구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삼별초 항쟁군과 연결되는 고리를 끊기 위해 중앙정부가 결정한 극단적 강제 이주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가 중앙정부가 실시한 강제소거라고 본다면 당시 거제현민들은 삼별초군과 함께 정부에 대항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거제현민들이 삼별초 군이 내세운 몽고와의 굴욕적 강화 교섭 및 개경환도 반대 등에 동조하며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높은 역사적 인식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까지 가능하다.

역사적 사료부족, 이주 규모 알기위한 체계적 노력 필요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자료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구의 침략을 피한 피난인지, 삼별초에 의한 집단 소거인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

또 거제인들의 집단이주가 1271년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고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로 추측하는 향토사학자들도 있다.

전갑생 전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은 "고려시대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에 대해서는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사료가 없어 정확한 사실을 알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면서 "당시 거제현의 정확한 이주 연도와 이주인들의 규모 등을 파악하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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