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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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신문
  • 승인 201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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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석 전 거제문인협회 회장
▲ 김한석 시조시인
삶과 죽음의 한계에서 '묘원(墓園)에 간다'는 말이 있다.

각박한 현실일수록 이 말은 그래도 여유로운 데가 있다.

사후를 안장에 맡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만한 복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다.

흔히 듣는 말로 자기의 말로를 죽음에 빗대어서 바르게 말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호사스럽게 말할 수도 없다.

어디까지나 이때의 언어는 숨겨두고 자기의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곤 한다.

그래서 각박한 현실을 더욱 피곤 하게하는 것일까?

자기 것을 빼고 말해서 그런지, 죽음 같은 삶의 종막도 아주 거침없이 달인처럼 언어표현이 되어가는 것이 요즘 현장 그대로다.

<죽어 썩어지는데 묘원(墓園)이 어디 있고, 그런 사람 팔자가 좋은 게지> <마, 화장해서 흩어버리는 게 제일 좋다. 안 그런가..> <돈 있는 사람이야 집 들듯이 묘지를 장만해서 들지만, 그게 다 헛 짓인 게라.> < 하긴 그렇지, 선대 묘도 팔아서 그 속에 영장은 화장해버리고 날려버리니 벌초 성 안가시고…>

더욱 심한 말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조상을 욕되게 하는 현실 그 순간이 곧 불손한 일상생활이 되어 곧 자녀교육에 비도덕적 악영향이 되고 있다. 

사후에 일을 여기서 다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경건해져야 한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바른 길이다.

돈과 부자만 사후의 안식처가 마련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각박하고 제마다의 사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 못하는 사체를 학대하거나 유기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죽음에 이르지 않은 주검을 쌍스럽게 말하거나 비하해서 타락된 언어로 사회를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

묘원(墓園)에 간다는 말은 죽음을 총괄하는 훌륭한 언어다.

종말의 처지에서 가질 수 있는 우리문화의 순치된 언어가 살아 있는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금실 좋은 부부가 자녀 교육에서 걱정이 덜 된다면 이들 가정에서 사용하는 말과 언어인 것이다.

말과 언어의 힘은 부를 갖는 맨 처음의 씨, 곧 종자다.

경우와 정도에 맞는 말이 다르겠지만 죽음에 처한 삶의 언어도 순화된 말을 쓰는 것이 정당하다.

묘원(墓園)이 부족한 사회로 고립되기보다는, 공동관심사로 죽음과 사후처리를 위한 사회적인 언어교육환경과, 이미 만원에 이른 묘원의 확충모색은 결코 배척될 상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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