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는 말 역시 서로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넋을 다해 바라보는 일관된 경지, 그것은 곧 해바라기의 화신 '크리티'의 보는 눈과 혼이 같은 마음임을 알 수가 있다.
우리들도 바라보는 것이 많다. 하늘과 산을 바라보고 하늘 속의 구름도 바라본다. 밤하늘의 별과 달을 또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더 많다. 영원히 볼 수 없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기억들은 생생하게 가슴을 치며 눈시울에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인간을 매료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보이는 것을 보려면 우선 시력(눈)의 본체가 건재해야 한다. 몸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늘도 물도 산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눈뿐만 아니라 부자유한 장애의 몸체 때문에 고통스럽고 슬픈 사람들이 얼마나 가득한가? 튼튼한 몸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소망의 일상에 묻힌 운신은 별로 신나는 일도 없다.
몸이 있거나 말거나 눈이 보이거나 말거나 한없는 게으름으로 그저 거기 펼쳐있는 하늘도 눈이 있어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눈이 있고 몸이 있어도 늘 이러한 싱거운 일상이어서는 안 된다. 가슴을 치고 눈시울에 떠오르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상은 눈과 몸의 건강 이상으로 마음의 눈, 마음의 몸이 더욱 소중함을 깨닫는다.
맹인이 있어 그의 손으로 사물을 더듬는다고 하지만 맹인이 어떤 대상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은 마음이 하는 것이다.
마음은 손보다도 눈보다도 유일한 접경(接景)의 창(窓)이다.
보고도 만지고도 읽지 못하는 세상을 마음은 능히 알아본다. 내 마음 노랗게 물들어 고마울 때 바라보는 해바라기 꽃은 더 없이 아름답다. 마음이 조급함에 자아를 배신하고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초토의 긴장마저 그 어느 순간도 마음이 작용하지 않을 때는 없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물신의 노예가 된다. 몸이 있어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어 몸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옳은 말이면서도 '정신일변도의 하성사' 에는 못 미친다.
그러므로 유심일원화의 진리는 여전하다. 마음! 보이지 않지만 얼마나 쉬운 것이냐! 공짜로 얼마든지 주어지는 마음, 이왕이면 옳은 마음을 심는 데에 믿음을 가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