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살 들어서야 겨우 엄마 아빠 발음을 알아듣던 손자 녀석이 네 살 들어서는 할아버지를 ‘아바디’로 승헌이라는 자기의 이름을 ‘너너니’로 표현하더니 어느 새 ‘하다부지’ ‘셔어니’로 바꿔 말했다.
그 녀석이 다섯 살에 접어들더니 드디어 사고를 쳤다. 조카를 찾아 어린이 놀이방을 찾아갔던 딸애가 황당한 일을 당한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이 녀석, 고모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와 품속에 안기며 말했다.
“고모 우리 선생 두 마리다 저거 말고 또 한
마리 있다”
뒤 따라 오던 선생님이 이 말을 듣고는 웃고 말았지만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딸애는 말문이 막혔다. 아이의 교육을 잘못시킨 책임을 물어 며느리를 나무랐더니 며느리는 차분히 말했다.
“진돗개를 좋아하시는 아버님 영향을 받은 탓입니다. 승헌이가 시골집에 다녀 온 후 말의 표현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며느리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변명이었다. 손자 녀석이 달포 가량을 시골집에서 보낼 때 일이다. 마당에 있는 애견을 둘러보는 나를 따라와 “할아버지 왜 개를 여러 명 데리고 있어?”
이 때 나는 개는 사람처럼 한 명 두 명 하지 않고 한 마리 두 마리로 표현 한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어린 마음에 혼돈을 일으킨 것일까, 어느 날 이 녀석이 또 한 차례 엉터리 소동을 빚었다.
“할아버지 밖에 나가 놀고 싶은데 개 한 명이 풀려있어서 못나가겠어요” 더 이상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손자 녀석은 동화속의 세상을 살고 있었다. 까만 눈을 깜빡이며 질문을 던진다.
“할아버지 가장 큰 공룡의 이름이 뭐야? 나르는 공룡은?”
“글세….”
“그것도 몰라, 제일 큰 거는 세이스모사우르스고 날아
다니는 공룡은 프테라노돈이잖아”
할아버지를 바보 취급한다.
어느 날 오후, 엄마를 찾는 그에게 거짓말을 해 봤다.
“할아버지 우리 엄마 어디 갔어요?”
“글쎄 아마 부산 너희 집으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밖으로 나가든데….”
그 말을 듣고 이 방 저 방을 토당토당 뛰어다니던 녀석이 저쪽 방에 있던 자기 엄마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오더니 눈은 똥그랗게 뜨고 손으로는 타원을 그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왜 거짓말 했어요? 할아버지도 피노키오처럼 코가 이마~안~큼 커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세상 참 많이 변했다.
70년대 중반, 손자의 아빠, 나의 장남이 여섯 살 때, 네 살 박이 그의 동생과 톱 하나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일이 새삼 떠오른다.
작은 애는 소(牛)를 베는 것, 큰 애는 어름 베는 것이라고 우기던 일이며 공교롭게도 작은 애 친구는 식육점 아들, 큰 애 친구는 얼음집 아들이었던 에피소드는 전기톱 시대를 열지 못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지금 어린이들 눈에 비치는 톱의 용도는 무엇일까? 나무를 자르는 전유물(專有物)에서 소와 얼음까지 제도(製圖)하던 70년대의 변화를 짐작이나 했을까, 세상은 쉴 새 없이 궤도수정이 진행되고 있다.
밥을 굶지 않기 위한 민생정치(民生政治)는 이제 복지(福祉)정치로 궤도를 수정했다. 지금 지방자치단체는 저마다의 특성을 살려 자립기반 조성에 혈안이다. 특히 지방정치 지도자는 선거공약(選擧公約)을 토대로 한 수익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거제시의 지난해 발표한 새 공원 조성사업, 요트계류장 건립, 어촌체험마을 육성 사업 등이 그러하다.
제아무리 시민과 약속한 시장의 공약사업이라 할지라도 시대상황에 따라서는 궤도수정이 불가피할 때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할 때다. 지도자가 약속을 고집하다 자칫 예산을 축내는 손실을 가져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