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노래' 부르는 사람마다 제각각
‘거제의 노래' 부르는 사람마다 제각각
  • 김석규 기자
  • 승인 2007.03.14
  • 호수 1
  • 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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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만들어진 노랫말 지역 3개 노래비마다 가사는 달라

   
▲ 거제지역 3곳에 세워진 거제의 노래비, 3개의 노래비는 모두 노랫말이 각각 달랐다.
1990년 거제청년회의소가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세운 노래비(사진 왼쪽), 1990년 당시 거제군 새마을지도자들이 해금강 주차장 입구에 세운 노래비 앞 뒷면(사진 가운데), 2004년 신현동인회가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거제종합운동장 앞에 세워 놓은 거제의 노래비(사진 오른쪽)

# ‘거제의 노래 탄생

‘거제의 노래'는 거제군이 통영군에서 복군(復郡)된 1953년 12월 만들어졌다.

1995년 6월25일 발행된 신용균 초대 거제 교육감의 회고록 ‘孝는 사랑의 샘’에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축도판인 우리 거제를 재천명하기 위하여 각부 면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담은 노래를 만들고자 군내에 널리 공모하여 수십 편의 노래 중에 하청중학교장 김기호 선생의 작품을 채택하여 도장학사 김원갑 학형의 주선으로 금수현 선생이 곡을 붙이고 장승포국교 심순심, 임금진 교사에게 안무를 맡겨 장승포 가설극장에서 첫 발표회를 가져 큰 성과를 가진 후에 각 학교에 보급, 애창하게 하여 우리 거제를 빛내는데 큰 공헌을 하다」라고 적혀있다.

또 1997년 무원 김기호 시조비 건립추진위원회가 1965년 10월 발행된 무원 시조집 ‘풍란(風蘭)’을 복간한 시조집 무원 연보에는 「1953년 12월23일 ‘거제의 노래'를 작사」했다고 돼 있다.

김한수 고현중 교장은 “1970년쯤 당시 어머니(황인아 여사)가 새마을부녀회장을 지내면서 회원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선친에게 노랫말과 곡을 받아 등사하고 남은 것을 지난 9일 어머니로부터 받았는데 같은 노랫말에 (민요곡)2/4박자, (행진곡)4/4박자 2개의 곡이 있었다”고 말했다.

# 제각각인 거제의 노랫말

1990년 거제JC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신현읍 고현리 세모여객선 터미널 맞은편에 세운 거제의 노래비, 1990년 12월 거제군 새마을지도자들이 해금강 주차장 입구에 세워 놓은 거제의 노래비, 신현동인회가 2004년 5월 거제종합운동장 앞에 세운 거제의 노래비.

또 무원 김기호 시조비 건립추진위원회가 복간한 ‘풍란’ 7부에 있는 거제의 노래, (취재과정에서 김한수 고현중 교장으로부터 입수)무원 선생의 부인이 1970년대 초 새마을부녀회장을 지낼 당시 무원 선생에게 얻은 것으로 추측되는 거제의 노래, 그리고 거제시가 대내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제의 노랫말 모두 달랐다.

거제시가 대내·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제의 노랫말은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칠백리
구비구비
스며배인 충무공의 그 자취 반역의 무리에서 지켜온 강토
에야디야 우리거제 영광의 고장

구천삼거리 물 따라 골도 깊어
계룡산 기슭에 폭포도 장관인데
갈고지 해금강은 고을의 절승

에야디야 우리거제 금수의 고장
동백꽃 그늘 여지러진 바위 끝에
미역이랑 가시리랑 캐는 아이 꿈을랑 두둥실 갈매기의 등에나
실고
에야디야 우리 거제 평화의 고장

이다.

▲ 서로 다른 거제의 노랫말 7군데를 비교한 표.
거제시의 노랫말을 기준으로 나머지 5개의 ‘거제의 노래' 가사를 비교하면 1990년 거제청년회의소가 세운 거제의 노래비에는 1절 ‘구비구비’가 ‘굽이굽이’로, 2절 ‘갈고지’가 ‘갈곶이’로, 3절 ‘여지러진’이 ‘어지러진’으로, ‘아이’가 ‘아기’로, ‘실고’가 ‘싣고’로 돼 있다.    

 해금강에 세워진 거제의 노래비에는 1절 ‘구비구비’가 ‘굽이굽이’로, 2절 ‘갈고지’가 ‘갈곶이’로, 3절 ‘가시리’가 ‘까시리’로,  ‘아이’가 ‘아기’로, ‘실고’가 ‘싣고’로 돼 있다.(‘등에다’로 돼 있던 것을 무원의 조카사위 박동준 전 동부중학교장이 ‘등에다’가 아닌 ‘등에나’라고 지적, 수정한 흔적이 남아있다)

또 신현동인회가 세운 노래비에는 3절 ‘여지러진’이 ‘이지러진’으로, ‘실고’가 ‘싣고’로 돼 있고, 복간된 시조집 ‘풍란’에는 3절 ‘가시리’가 ‘까시리’로, ‘아이 꿈을랑’이 ‘아기 꿈을란’으로 돼 있다.

특히 1970년 무원의 부인이 새마을 부녀회원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기 위해 등사한 노랫말에는 3절 ‘가시리’가 ‘까시리’로, ‘아이’가 ‘아기’로 돼 있다. 

# 정확한 노랫말 찾자

▲ 1970년대 당시 무원의 부인이 무원으로부터 받은 '거제의 노래' 악보(사진 왼쪽), 무원 김기호 시조비 건립추진위원회가 1997년 복간한 김기호 시조집 '풍란'에 적힌 거제의 노랫말.(사진 오른쪽)
정확한 거제의 노랫말을 찾기란 쉽지 만은 않았다.

6개의 노랫말 가운데 가사가 다른 7곳 중에서 ‘구비구비’  ‘갈고지’  ‘여지러진’  ‘꿈을랑’  ‘싣고’ 등이 맞다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없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아이’와 ‘아기’, ‘가시리’와 ‘까시리’, 가시리와 까시리는 우뭇가사리의 사투리로 의미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아이’와 ‘아기’는 어느 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했다.

50대 후반과 60대 초반 어르신들은 대부분 ‘거제의 노러 3절 가사는 몰랐으며, 기억해 내더라도 ‘아이’와 ‘아기’ 중 엇비슷한 비율로 가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 시민은 “정확한 거제의 노랫말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가시리’와 ‘까시리’, ‘아이’와 ‘아기’ 중에서 어느 하나로 통일시켜 가사를 정립하면 여러 노랫말로 나눠진 현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한수 고현중 교장은 “추앙받고 있는 선친의 아들로 노랫말도 제대로 알지 못해 부끄럽기 그지없다”면서 “정확한 거제의 노랫말 찾기는 물론 통일된 노랫말 만들기에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거제시 관계자는 “나름대로 거제의 노랫말을 정립한다고 했지만 대중화 되지 못한 것 같다”면서 “정확한 노랫말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차선책으로 노랫말을 통일시켜 거제시민이 서로 다른 노랫말로 거제의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또 “거제시에 세워져 있는 거제의 노래비도 (정확한 가사를 찾거나 가사가 통일되면) 모두 똑같은 노랫말로 다시 새기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 김기호(金琪鎬)

▲ 무원 김기호(1912-1978)
호는 무원(蕪園), 교육자이자 시조시인, 서예가인 김기호 선생은 1912년 9월10일 하청면 실전리 사환마을에서 아버지 김종선(金鍾善)과 어머니 칠원 윤씨(尹氏)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합격, 1935년 졸업해 9년간 부산 수영공립보통학교, 남부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지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고향 하청에 돌아와 거제도에 중학교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다 1946년 8월 하청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1951년 9월 하청사립중학교, 1953년 4월 하청사립고등학교 교육재단을 설립, 초대 교장으로 취임,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60년 하청중·고교를 국가에 헌납해 공립학교로 전환했으며 고등공민학교는 거제농업고등학교로 개칭, 아열대 6백여종의 수목원을 조성했다.

1955년과 1957년 동아일보의 현상문예와 신춘문예 시조부분에 ‘옹화부’, ‘청산곡’이 각각 당선됐으며, 1965년 10월 그의 시조집 ‘풍란(風蘭)’을 간행했다.

30대 젊은 나이에 교장에 취임해 거제 교육발전을 위해 열정을 바치며 노력한 선생은 1978년 12월4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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