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기록마저도 정복자의 몫이 됐던 시대, 새로운 왕조 혹은 부족의 장은 그들의 기준에서 역사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에서 2번째 큰 섬 거제. 총면적 402.01㎢, 섬 둘레 443㎞. 주변 62개 도서로 구성된 세계적 조선해양관광 도시 거제의 역사 또한 독자성의 결여는 당연했다.
하지만 역사의 흔적조차도 없었던 수만, 수천, 수억년 전부터 거제도는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꿋꿋이 오늘날까지 버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특히 토막토막 이어진 역사의 흔적에서 거제가 기원전부터 독자적인 국가(부족)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오늘날 '정체성' 회복에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제의 역사는 고려 성종까지를 간추려 보면 △삼한시대 변한 12개국 중 독로국이라 칭하고 왕도지는 사등 △AD 520년 신라 법흥왕 7년 소가야국으로 개칭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 금관가야국의 일부 △677년 신라 30대 문무왕 17년 상군이라 칭함 △757년 신라 35대 경덕왕 16년 거제군으로 고침 △983년 고려 6대 성종 2년 기성현이라 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통일신라 전까지 자치국가가 있었다"
거제의 역사에서 '두로국(瀆盧國)'의 의미는 각별하다. 소심한 역사, 향토사학자들은 변한의 한 자치단체로 규정할 수 있는 '두로국'을 평가절상시키는 것에 인색했다. 다만 2002년 5월 발간한 '거제시지'만이 비교적 두로국에 의미를 부여했다.
'거제시지'에 따르면 두로국은 삼한시대 변한의 12개국 하나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국지 변진한전의 "변한의 두로국은 왜로부터 경계를 연접한다"라는 기록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거제지역의 두로국의 존재는 곧 삼한시대 소국(小國)을 형성한 상당 규모의 독립적인 정치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비록 섬 지역이기는 하나 풍부한 물과 지금의 거제면, 사등면, 연초면 등지의 적지 않은 농경지가 있었음은 거제지역에서도 독자적인 활동을 펼친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두로국에 위치한 거제지역의 소국은 3세기 초반, 전기 가야시대까지도 남해안 연안의 정치세력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력한 정치집단으로 존재했다.
신라의 통일 '상군-거제군' 독자적 이름 얻다
거제가 최초의 이름을 얻은 것은 677년 문무왕 시대로 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거제군편에 '거제군에 문무왕이 처음으로 상군(裳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에서 연유한다.
거제라는 명칭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것은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이다. 통일신라는 지방행정을 개편하면서 경덕왕 16년(757년) 거제군(巨濟郡)으로 개명했다.
또 현 장승포시 아주동 일대를 '아주현', 거제면 명진리 일대를 '명진현', 남부면 다대리 일대는 '남수현'으로 삼았다.
이같은 사실은 거제지역의 유력한 정치세력이 그 독립적 위상을 상실하고 통일신라 체제에 종속된 것으로 해석되며, 신라의 중앙집권주의라는 통치제제가 강력했던 것을 반증한다.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실은 상군, 거제군이라는 명칭을 얻으면서 '치소(治所)' 즉 통치영역이 어디까지였느냐는 것인데, '거림리(현 둔덕면 일대)'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거제군과 세 영현에도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치소인 읍사(邑), 말단행정 구역에는 행정촌과 자연촌이 편재돼 있었다는 것도 추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거제도는 환경이 척박한 섬지역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왜(일본)와 해양으로 나아가는 교두보로 군사·외교적 창구역할을 톡톡히 한 요충지였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최근 통영·고성과의 통합이 논의되면서 조선시대 이후에 일어난 행정지역의 통합과 분리 사실만을 부각시키면서 '거제'의 정체성을 폄하하는 것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제도는 기원전부터 신라가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내륙의 그 어느 지역보다 뚜렷하면서 독자적인 행보를 걸어온 당당한 지방의 한 행정구역이었다는 정체성은 정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