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은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절대 선이 아닌, 가진 것을 나누지 않기에 질타되어지는 나쁜 표징이 되었다. 때문에 아흔아홉(99%)에 든 사람들은 저 하나(1%)가 개선되어지고 구원받아할 대상이 아니라 맞아서 부셔지고 없어져야할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김규항은 자신의 글에서 "인류가 생긴 이래,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존재했다. 남보다 많이 갖거나 남보다 앞서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런 걸 오히려 불편해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눈에 밟혀 더디더라도 함께 가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이다. 앞의 것은 한줌의 지배계급에게, 뒤의 것은 대다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생각이다"고 정의하고 "인류 역사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 두 가지 생각의 대립이기도 했다"고 결론했다. 참으로 공감되는 말이다.
이것은 저 하나(1%)의 다 가진 자와 나머지 못 가진 아흔아홉(99%)의 대립 내지는 갈등인 것이다. 그는 예로 제주도의 해녀 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속, 한 할머니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할머니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가 있지."
"그런데 왜 안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그렇다, 내가 아흔아홉의 하나이면서 나 또한 온 백(100%)의 하나라는 인식이면 되는 것이다. 이러면 모두가 행복한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신약성경의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이 귀하다"(누가복음15:3~7)는 예화를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이미 의로운 아흔아홉이 있기에 의롭지 못한 하나가 의롭게 돌아오는 것이 귀한 것인데 마치 아흔아홉은 별 의미 없고 오로지 순간으로 변화된 자신 하나만 귀하다고 생각하는, 한줌의 지배계급 의식을 가진 기득세력들이 지금의 저 하나(1%)를 질시의 대상으로 키웠다는 의구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평생 물질로 살아온 해녀 할머니가 자신만 생각하고 많이 가져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고 인내하고서라도 아흔아홉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과 나 하나 구원 받아 아흔아홉 보다 내가 더 행복해야 한다는 차이는 너무나 명확한 것이다.
나 하나로 인해 아흔아홉이 다 같이 행복해지고 나 또한 더 행복하고 의로워져 온 백이 다 같이 귀해지는 것임을 안다면 굳이 성경구절이 아니라도 "99%가 1%의 잉여적 존재인가, 아니면 1%가 99%의 잉여적 존재인가?"란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