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은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아니 여자에게 목말라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조선의 관념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내가 여자들과 같은 반에서 공부한 것은 초등학교 1, 2학년이 전부였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소위 '미팅'이란 것이 있어서 여자를 만날 수 있었으니 '사랑의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건 '전공필수'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저자가 책의 첫머리에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우리가 기대한 바와는 달리 작업의 정석, 혹은 연애 기술은 결코 아니었다. 그 후 나는 '사랑의 기술'이 부족하여 수많은 가슴앓이와 고통,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이 책은 성숙한 사랑을 꿈꾸는 인류를 위한 현대의 고전이라 할 만하다. 예리한 통찰로 사랑이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며, 의지이자 노력, 결의이자 판단, 그리고 약속임을 강조하는 책이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사랑의 본질을 분석ㆍ해석하고, 사랑의 이론과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에릭 프롬은 "사랑하고 싶은가. 배우고 훈련하라"고 말한다. 독일에서 출생한 사회심리학자인데, 유대인인 그는 나치가 등장하자 1934년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그의 사회심리학은 20세기의 주요한 지적 흐름의 하나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프롬은 사랑은 기술(art)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사랑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데는 음악이나 의학, 공학을 배우는 것처럼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떤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랑은 중생 본래의 성질인 자기 본인 위주의 이기적 마음이 어떤 대상을 통하여 최소화 되었을 때 겪게 되는 마음의 상태 같다.
사랑에 빠지면 본인 위주로 생각하는 중생의 습관이 잠시 쉬고 마음의 축이 사랑하는 대상으로 향하게 된다. 사랑하는 이가 무슨 음악을 즐겨 듣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색깔의 옷을 즐겨 입는지 까지 하나하나 알고자하니 마음은 오직 그 대상 밖에 없다. 사랑은 또 희생이라는 단어와 화음을 이룬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아닌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도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기도 한다. 칼릴지브란이 그랬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영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고. 마치 한 지붕을 받들고 있는 두 기둥처럼 너무 가까이 있지도 너무 떨어져있지도 말라고.
반대로 사랑이 구속이 아닌 승화의 길을 걷게 되면 수행의 과정이 된다. 종교적 수행자의 신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이 그와 같다.
사랑이란 결국 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면서 그 상대방의 삶도 사랑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하도록 내가 돕기 위해서 우선은 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면서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 모범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크고 좋은 선물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사랑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