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인 집단 이주, 왜구보다 삼별초에 '무게'
거제인 집단 이주, 왜구보다 삼별초에 '무게'
  • 거제신문
  • 승인 201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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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정체성과 만나기②]그래도 희망은 있었다-삼별초 항전의 터

세계적 조선해양 도시, 관광의 도시 거제도.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거제도 역사를 재조명해 보는 것은 지역을 넘어 대한민국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냉정한 역사적 사실이 주는 배움과 교훈은 물론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와 감동, 거제인에 대한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 마련을 위해 이번 기획을 준비했다. 아울러 기획기사에서 의도치 않은 역사적 사실의 오류도 발생할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 따라서 이번 기획이 거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다양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거제사·세종실록지리지 "1271년, 원종 12년 왜구 침입으로 이주"

거제의 옛 역사를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삼별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제인의 집단이주에 대한 기록들이 나타나 있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당시 거제인들은 고려가 건국되고 353년 이후, 정든 고향 땅을 뒤로 한 채 머나먼 육지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왜구로 인한 극심한 피해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거제사람들을 안전한 땅으로 정착시킨 것으로 나타나 있다. 

거제사람들의 피난 행렬이 있었던 것은 문헌의 기록 상 1271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의 경우 그 이전부터 개인 또는 소규모의 피난행렬이 있었을 것이라 보고 있지만 공식적인 피난은 고려 원종 12년으로 귀결된다.

▲ 남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평탄한 대지 위에 돌로 축조된 남도석성. 고려 원종 때 삼별초군이 진도에서 머물면서 해안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되는 문헌과 의견이 현재에는 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원종 때 거제현령이 삼별초의 난을 피해 관아를 가조현에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에도 '원종13년 삼별초가 거제에 침입해 전함 3척을 불사르고 현령을 잡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놓고 본다면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 원인은 왜구가 아닌 삼별초의 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경우 삼별초의 활동이 남해안 지역에서 활발히 이뤄져 충분한 역사적 개연성을 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시기가 고려 말부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 원인을 삼별초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특히 고려사에는 원종12년 왜구가 활동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이를 뒷받침해 준다. 또 '가조현이 원종 12년 거제에 이속됐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옛 문헌들에 대한 신빙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창군의 시대별 사항을 집대성한 거창군지에는 '제창현의 소멸과 거제환도'라는 제목으로 옛 거제인들의 집단이주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왕실의 국가통제력이 약화돼 도적이 사방에서 일었고, 바다를 통해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들은 바닷가는 물론 육지 깊숙한 곳까지 침입해 많은 피해를 입히던 때였다.

특히 고려 원종 때는 환도문제를 놓고 배중손과 김통정 등의 일부 무신들이 무력항거를 통해 남해안을 장악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한 시기였다.

거창군지에는 '고려 원종 12년 거제현은 삼별초 군사들에게 땅을 뺏기고 가조지방으로 피난을 와 환도 할 때까지 약 150년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돼 있다.

왜구 보다는 삼별초에 의한 피난이 집단 이주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 대몽항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 장군의 위패를 봉인한 사당.

신증동국여지승람 "원종 13년 삼별초 난으로 거제 떠나"

고려사에는 원종12년(1271년) 당시 거제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삼별초군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별초가 항쟁군을 일으켜 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하고, 고려와 원나라 군사가 이를 진압하던 시기여서 왜구가 침략할 정황은 희박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삼별초 군은 몽고군과 중앙정부를 옹호하는 관헌들까지 모두 잡아가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원종 13년(1272년) 11월, 삼별초가 거제현에 입구, 전함 3척을 불사르고 현령을 잡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단 이주는 왜구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삼별초 항쟁군과 연결되는 고리를 끊기 위해 중앙정부가 결정한 극단적 강제 이주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거제인들의 집단 이주가 중앙정부가 실시한 강제소거라고 본다면 당시 거제현민들은 삼별초군과 함께 정부에 대항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거제현민들이 삼별초 군이 내세운 몽고와의 굴욕적 강화 교섭 및 개경환도 반대 등에 동조하며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높은 역사적 인식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까지 가능하다.

지방이라는 지역적·태생적 한계를 뛰어넘는 높은 식견과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갈구. 그 추론이 정확하다면 거제지역 선조들의 위대함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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