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중앙정부 최대 과제는 삼별초 세력에 대응하는 것
거제현은 남해안 해상교통의 거점…공도로 존립 위기 맞아

삼별초 세력권에 있던 거제현 공도정책
공도정책(空島政策) 또는 공도책(空島策)은 말 그대로 섬을 비우는 정책이다. 외부 세력으로부터 섬을 보호할 힘이 없을 때 섬을 비워 변방 주민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공도정책은 고려 말기에 시작돼 조선시대에 걸쳐 시행됐다.
고려 말 섬을 비워버린 공도 조치는 서남해지역 세력이 삼별초에 동조할 것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공도화의 대상은 거제도를 비롯해 진도, 압해도, 흑산도, 장산도, 남해도 등과 같이 주로 해상세력이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큰 섬들이었다. 결국 고려 말 공도 조치는 이들 해상세력에 대한 국가의 탄압이라는 의미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원종12년 거제현령이 삼별초의 난을 피해 관아를 가조현에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삼별초는 농민층의 참여와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고, 지방의 여러 주현을 통괄하기도 했다. 특히 원종 12년 1월에는 경상도 지역과 개경 등지에서 삼별초에 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나 그 지방의 토착세력과 군현민이 가담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두고 본다면 당시 중앙정부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삼별초 세력에 대응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남해안 해상교통의 거점이었던 거제현은 삼별초 세력권에 놓여있었다. 당연히 해상조운의 방해를 받아 중앙정부의 재정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고려사절요는 '원종13년 삼별초가 거제에 침입해 전함 3척을 불사르고 현령을 잡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거제인들을 내륙으로 집단 이주시킨 다음해에 보인 삼별초의 군사행동은 중앙정부의 공도정책에 동조한 거제현의 지방관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시에는 원나라의 과중한 군량 요구와 중앙정부의 가혹한 수취에 따라 거제와 고성을 비롯한 남해연안 지역 백성들의 생활상이 피폐된 때다. 당연히 거제의 토착세력 등이 삼별초에 적극적으로 호응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모순구조와 몽고에 대한 저항
고려 원종 당시 거제지역은 한·일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원종 8년 송군비, 김찬이 몽고의 사신과 더불어 거제도 송변포에 이르러 풍파가 험한 것을 보고 두려워서 드디어 돌아왔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삼별초의 난 때문에 감행된 공도정책으로 거제현은 존립 위기를 맞아야 했다. 삼별초의 난이 마무리 된 뒤에도 지속적인 왜구의 침입과 여원연합군의 일본 동정 준비 등으로 거제지역은 피폐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사 조운흘전에는 '우리나라는 왜국과 가깝고 육지로부터는 오랑캐 땅과 인접되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바다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섬은 대청, 소청, 교동, 강화, 진도, 절영, 남해, 거제 등의 큰 섬이 20곳이나 있으며 작은 섬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섬들은 토지가 비옥하고 어염의 자원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황폐되어 경영하지 않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 말 거제인의 집단이주는 민족사와 거제사에서 그 역할이 크게 약화됐던 시기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거제인들은 중앙정부의 사회·경제적 모순구조에 저항하고, 몽고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